[고전산문]물결의 흐름을 보고 그 근원의 맑고 흐림을 안다
추측록 서(推測錄序)
하늘을 이어받아 이루어진 것이 인간의 본성[性]이고, 이 본성을 따라 익히는 것이 미룸[推]이며, 미룬 것으로 바르게 재는 것이 헤아림[測]이다. 미룸과 헤아림은 예부터 모든 사람들이 함께 말미암는 대도(大道)다.
그러므로 미룸이 올바르면 헤아림에 방법이 생기고 미룸이 올바르지 못하면 헤아림도 올바르지 못하다. 올바름을 잃은 곳에서는 미룸을 바꾸어 헤아림을 고치고 올바름을 얻는 곳에서는 원위(源委 근본과 말단)를 밝혀서 중정(中正)의 표준을 세울 것이다. 이에 지나치면 허망(虛妄)에 돌아가고, 이에 미치지 못하면 비색(鄙塞: 엉뚱한 곳으로 빠져 막힘)에 빠진다.
아득한 옛날 태호(太昊 상고 시대의 제왕 복희(伏羲)를 말함)가 위로는 하늘을 보고 아래로는 땅을 살펴, 가까이는 자기 몸에서 취하고 멀리는 사물에서 구하여 우주(宇宙)를 통달하였는데 이것이 추측(推測)의 기본 법칙이고, 《대학(大學)》의 격물(格物)과 혈구(絜矩)에 이르러서는 만세를 위해 베풀어준 가르침이다. 이는 반드시 옛 현인(賢人)을 상고하고 당시를 참고하며, 일상 생활에서 증험하고 사물의 법칙을 고찰하여 후학(後學)에게 길을 열어준 것이다. 그러므로 뒤에 이것을 연구하는 자는 마땅히 힘이 덜어질 것인데도, 물리(物理)에 순응하여 법칙을 따르는 자는 적고, 언제나 자기 소견을 가지고 조작하여 그림자를 참모습으로, 껍데기를 실질로 아는 자가 많다. 그리하여 얻은 것이 잃은 것을 보상하지 못하고 말이 고원(高遠:고상하고 난해함)할수록 도(道)는 더욱 천해져 고집스럽게 변쟁(辯爭)해도 결론이 정해지지 않으니, 어찌 그 근본에 돌아가 그 도를 세우겠는가.
대개 하늘의 기(氣)가 유행(流行)하는 이(理)는 물(物)에 있어 각각 마땅한 바가 있는지라 원래 증감(增減)이 없다. 이 이(理)를 궁격(窮格:궁리하여 바르게 정리함)할 수 있는 것은 사람 마음의 추측(推測)인데, 여기에는 사람에 따라 잘하고 잘못함과 진실하고 진실하지 못한 차이가 있으나, 이 역시 이(理)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유행과 추측이 부합되는 것으로 말하면 이쪽과 저쪽의 이(理)는 일치하지만, 유행과 추측이 부합되지 않을 경우에는 이(理)가 현저하게 다르다. 만약 이에 허실(虛實)의 차이가 있음을 모르면, 잘하고 잘못하는 것을 가려 선택할 방법이 없고, 진실한 것과 진실하지 못한 것이 뒤섞이는 폐단이 생긴다.
생각건대, 옛날 성인(聖人)도 다만 마음과 물(物)로써 공부하였고, 후학도 마음과 물로써 공부하였다. 그러므로 마음과 물에는 고금의 차이가 없으나, 오직 마음이 미루는 바에는 절로 진실과 허위의 다름이 있어 그 헤아리는 바도 이에 따라 나누어지는 것이다. 반드시 옛사람이 은미한 단서로 드러낸 말을 완전히 제거하여 그 실제를 탐구하고, 뒤에 다시 옛사람이 단서로 드러낸 말까지도 그 뜻을 규명하여야 한다. 특히 성인과 범인의 같은 것과 사람과 만물의 서로 같은 것과 본말(本末)이 어긋나지 않는 것과 대소(大小)가 상호 관계된 것 등을 빠짐없이 거론해야 하는데,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추측이란 말을 천명한 것이다.
그 전체를 말하면 평생의 추측이 있고, 그 쓰임으로 말하면 그 때마다의 추측이 있다. 대저 추측의 도는 항상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것을 따라 행하여 그 도를 잃지 않으면, 도가 사람이 그것을 얻었다고 허여하지는 않지만 사람 마음이 편안하며, 사람이 혹 그것을 따르다 그 도를 잃으면 도가 사람이 그것을 잃었다고 기롱하지는 않지만 사람 마음이 자연히 편안하지 못하다. 그러니 편안함과 편안하지 못함이 어찌 행동한 뒤에 정해지는 것이며 또 지나갔다고 하여 문득 마음에서 잊어버리는 것이겠는가.
오직 기(氣)를 미루어서 이(理)를 헤아리고, 정(情)을 미루어서 성(性)을 헤아리고, 동(動)을 미루어서 정(靜)을 헤아리고, 자기를 미루어서 남을 헤아리고, 물(物)을 미루어서 일[事]을 헤아릴 뿐이다. 하루하루 점점 쌓아 은미한 것을 드러내고 드러난 것을 통하게 하면, 추측과 유행이 자연히 합해져 하나의 이(理)가 된다. 그리하여 헛된 그림자는 옆으로 옮겨가고, 혼미의 물결은 밖에서부터 사라진다. 여기에 추측을 기록하여 도(道)를 궁구하는 자에게는 도를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되고, 도를 지키는 자에게는 버릴 수 없는 방법이 되기를, 마치 물건의 경중이나 모나고 둥근 것에 대한 저울과 자와 같기를 바란다.
도광(道光 청 선종(淸宣宗)의 연호 1821~1850) 병신년(헌종(憲宗) 2, 1836) 중춘에 패동(浿東) 최한기(崔漢綺)는 혜강유거(惠崗幽居)에서 쓴다.
추기측리(推氣測理)
추측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자는 자기 한 몸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고, 추측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 자는 만민(萬民)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는다. 추측에 대해 모르는 자는 천지의 큰 도는 작위(作爲)가 없으면서 하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나, 추측에 대해 아는 자는 '천지의 큰 도는 하는 일이 있지만 헤아릴 수 없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추측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자는 다만 자기의 추측만 가지고 편벽되고 가려진 병통을 제거하지 못하며, 나와 남이 같은 점을 미루어 통달하지 못하고, 알 수 없는 것은 억지로 끼워 맞춘다. 따라서 밝은 것이 도리어 어둡고, 말이 많을수록 더욱더 틀려진다. 그러나 추측에 대해 아는 자는 넓게 미루어 나갈 수가 있는 것은 정밀하게 미루어 나가 그 적절함을 다하고, 헤아릴 수 없는 것에 있어서는 그 헤아릴 수 없는 점을 밝힌다. 대개 한 사람의 마음은 여러 사람의 마음과 같으므로 한 사람의 마음을 미루어 여러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하고 즐거움을 기뻐하고 근심을 같이 걱정한다.
천지가 비록 크나 반드시 천지의 하는 일이 있는데, 사람의 적은 정력으로 그 광대한 규모와 설치조차 헤아릴 수 없으니, 어떻게 그 하는 일을 헤아리겠는가. 알 수 없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 일만 모를 뿐 아니라 알 수 있는 일을 아는 데도 정밀하지 못하다. 그러니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없다고 하는 사람만이 그 아는 것이 정밀하여 미루어나갈 수 있다.
추정측성(推情測性)
사람과 만물은 하늘의 기(氣)와 땅의 질(質)을 선천적으로 타고남으로 성(性)과 정(情)을 예외없이 가지고 있다. 그 생리(生理)를 성(性)이라 하고, 성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을 정(情)이라고 한다. 대개 성은 보기가 어렵고 정은 알기 쉬우므로, 정을 미루어 성을 헤아리는 것이다.
사람과 만물은 모두 성과 정을 갖추고 있기때문에 사람의 성(性)과 정(情)으로 만물의 성과 정을 비교하고 고찰하여 그것들이 근본을 하나로 하고 있는 원리를 알게 되면, 알아낸 성과 정이 거의 잘못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성(性)은 인의예지(仁義禮知)요 정(情)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이며, 금석초목(金石草木)의 성(性)은 견강유인(堅剛柔靭)이요 정(情)은 가물면 마르고 비 오면 불어나는 것이니, 사람의 희로애락의 정으로 인의예지의 성을 헤아리는 것이 마치 금석초목의 마르고 불어나는 정으로 견강유인의 성을 헤아리는 것과 같다.
희로애락이 올바른 사람은 그 성(性)도 바르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희로애락이 바르지 못한 사람은 그 성도 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속에 쌓여 있는 것은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밖에 나타난 것을 따라 그 속에 쌓여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물결이 흐리면 반드시 그 근원이 맑지 못하다. 따라서 물결의 흐름을 보고 그 근원의 맑고 흐림을 알 수 있다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知)의 이름은 성(性)을 미룸(推)에서 나오고, 측은(惻隱)ㆍ수오(羞惡)ㆍ사양(辭讓)ㆍ시비(是非)의 사단은 정(情)을 헤아림(測)에서 나오는 것이다. 성(性)은 다른 곳으로부터 알기를 구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나타나는 바의 실마리를 따라 그 근원을 헤아려야 한다.
《맹자(孟子)》에 "측은히 여기는 것은 인의 실마리요, 부끄러이 여기고 미워하는 것은 의의 실마리이며, 사양하는 것은 예의 실마리요, 옳게 여기고 그르게 여기는 것은 지의 실마리다." 한 것은 대개 후학(後學)들로 하여금 측은으로부터 미루어 가서 그 인을 확충하고, 수오로부터 미루어 가서 그 의를 확충하며, 사양으로부터 그 예로 나아가고, 시비로부터 그 지혜를 이루게 하고자 함이니, 진실로 이것이 정을 미루어 성을 헤아리는 것이다.
정(情)으로 나타난 것을 이름지은 것이 비록 일곱 가지가 있으나, 생(生)에 알맞은 것은 좋아하고 생에 알맞지 않은 것은 미워하는 까달에, 실상은 호오(好惡: 좋아함과 싫어함)뿐이다. 칠정(七情)이란 희(喜)ㆍ노(怒)ㆍ애(哀)ㆍ락(樂)ㆍ애(愛)ㆍ오(惡)ㆍ욕(欲)이다. 정(情)의 발현에 어찌 이같이 실마리가 많겠는가. 진실로 그 실(實)을 추구해 보면 대개 호오(好惡)가 있을 뿐이지만, 그 호오에 각각 천심(淺深: 얕음과 깊음)이 같지 않으므로 여러 가지 이름이 있게 된 것이다. 싫어함의 절실한 것이 슬픔이 되고 미움의 격렬한 것이 노여움이 되며, 좋아함의 나타난 것이 기쁨이 되고 좋아함의 드러난 것이 즐거움이 되며, 좋아함이 대상에 미친 것이 사랑이 되고, 싫은 것을 피하여 좋은 것으로 옮아가는 것이 욕(欲)이 되는 것이다. 다만 추측을 아는 이는 그 좋아할 바를 좋아하고 미워할 바를 미워하나, 추측을 모르는 이는 혹 미워할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좋아할 것을 미워하기도 하여,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싫어하고 남들이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추동측정(推動測靜)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은 먼저 기색에 나타나고 끝에는 언사(어떠한 태도나 느낌으로서의 말)에 드러난다. 그 말이 허풍스럽고 자랑이 많은 자는 그 마음이 허술하여 미덥지 못하고, 그 말이 조리가 없고 실마리가 없는 자는 그 마음이 잡다한 것으로 흩어져 있으며, 그 말이 굳고 변동이 없는 이는 그 마음에 지킴이 있고, 그 말이 자세하고 이치가 있는 이는 그 마음에 얻음이 있으며, 그 말이 남의 뜻만 따라 아첨하는 자는 그 마음에 바라는 것이 있고, 그 말이 까닭 없이 남의 뜻을 거스르는 자는 마음에 노여움이 있다.
기색을 추측하는 것도 이와 같으니, 마음에 즐거움이 있는 이는 그 얼굴이 화기애애하여 상냥하며, 마음에 근심이 있는 이는 그 얼굴이 침울하고, 마음에 변동이 있는 이는 그 얼굴에 움직임이 있고, 마음에 의혹이 있는 이는 그 얼굴에 두려움이 있다. 인정(人情)과 물태(物態)가 비록 실마리가 수없이 많지만, 그 대략의 예를 미루어 살펴보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옛날 책을 읽고서 당시의 사리(事理)를 연구하고, 말을 듣고 그 사람의 뜻을 아는 것은, 모두 이미 동한 바의 글과 말을 미루어 내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남의 말을 듣고 때로 그 마음의 이욕(利慾)과 분노(忿怒)를 일으키지만, 옛날 책 가운데 착한 것을 권장하고 악한 것을 징계함에 이르러서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도 끝내 그 이유를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적고 흥발(興發)하는 것도 역시 드물다. 그러나 학문에서 얻음이 있는 이는 말을 듣고 글을 읽는 것이 조금도 다를 것이 없어서, 모두 마음의 은미(隱微)한 곳을 개발하지 않는 것이 없다.
추기측인(推己測人)
남과 내가 본성은 같으나 습관이 다르므로, 나는 그 같음을 들어서 그 다름을 헤아릴 수 있다. 본성이 만일 다르다면 어찌 그 다름을 가지고 다름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남과 나에게 같지 않음이 있는 것은, 그 처(處)한 곳과 익힌 바가 달라 견문이 또한 다르고 견문이 이미 다르므로 추향(趨向:마음에 끌리어 따라감)도 다른 때문이다. 그 태어날 때부터 구유(具有:갖춤)한 것으로 말하면 같지 않음이 없으므로, 안으로 오성 칠정(五性七情)과 목마르면 물마시고 배고프면 밥먹고 여름에는 베옷 입고 겨울에는 털옷 입는 것으로부터 군신(君臣)ㆍ부자(父子)ㆍ부부(夫婦)ㆍ장유(長幼)ㆍ붕우(朋友)의 모든 윤리에 이르기까지, 이것이 나에게도 있고 또 남에게도 있는 것이다.
이른바 같지 않은 것도 이 태어날 때부터 구유(具有)한 것에 말미암지 않음이 없으나, 다만 거기에 통색(通塞:통함과 막힘)과 순역(順逆;순리와역리)의 분별이 있을 뿐이다. 만일 남과 내가 태어날 때부터 구유한 것이 본래 같지 않다고 하면 이는 본(本)과 말(末)에 모두 같은 바가 없는 것이니, 내가 무엇을 가지고 남을 헤아리겠는가.
내가 남을 헤아려 줌이 깊고 절실하면 남도 나를 헤아려 사복(思服)할 것이나, 내가 남을 헤아려 줌이 극진하지 못하면 남도 나를 헤아릴 길이 없어 마침내 사복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찾아와 시비를 다툴 때 내가 그 사람의 생각이 미치지 못한 점을 들어 깨우치되, 그 사람이 능히 나의 깨우침의 적절함을 알면 반드시 복종하여 따를 것이나, 나의 타이름을 능히 잘못 알면 반드시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깨우쳐 능히 성심으로 열복(悅服:기쁜마음으로 따름)하게 하지 못하거나 남에게 말을 들려 주어 능히 즐거이 본받게 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추측(推測)의 도를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자신을 아는 것의 천심 주편(淺深周偏: 인식의 깊이와 넓이)은 마땅히 남을 아는 것의 천심 주편으로 그 우열(優劣)을 결정하여야 한다. 남을 아는 것이 깊은 사람은 반드시 자신을 아는 것도 깊고, 남을 아는 것이 얕은 사람은 반드시 자신을 아는 것도 얕으며, 두루하고 치우침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을 안다고 하는 것이 어찌 자기의 사정(事情)만 알고 남의 사정을 모르는 것이랴! 자기를 다하고[盡己] 사물까지 다한[盡物] 뒤에야 바야흐로 자신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니, 만일 능히 남을 아는 도(道)를 다하지도 못하면서 문득 자신을 밝게 안다 하는 사람은 반드시 식견이 천박하고 치우친 사람이다. 능히 남을 아는 도를 다하는 사람은, 혹 자신을 아는 것에 다하지 못한 것이 있지 않을까, 또 자신을 아는 것이 비록 다하였더라도 혹 남을 아는 데 다하지 못한 것이 있지 않을까 하고 항상 생각하여, 양쪽을 서로 참작하여 드러내니 바로 이것이 추측의 도이다.
하물며 자신을 아는 것과 남을 아는 것에는 원래 일정한 준적(準的)이 없어 항상 때에 따라 알맞음을 얻는 데 있음에랴! 무릇 자신을 아는 것이 어려운 까닭은 기질(氣質)의 병에 있고, 남을 아는 것이 어려운 까닭은 때에 따라 변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기질의 병이 무엇인지를 알고 또 때에 따라 어떻게 변했는가를 안 뒤에야 자신을 알고 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추물측사(推物測事)
좋아할 만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일에 유익하기 때문이니 좋아하지 아니하면서 등용하면 반드시 일을 해치게 되고, 미워할 만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일에 해롭기 때문이니 미워하지 않으면서 물리쳐 내치면 반드시 일을 해치게 된다.
지위가 있는 사람은 직임(職任)으로 일을 삼고, 직위가 없는 선비는 도학으로 일을 삼고, 범민(凡民)은 농업이나 공업이나 상업으로 일을 삼는다. 그러나 일용 상행(日用常行)이나 사람을 기다려서 성사할 수 있는 것에 이르러서는 귀천과 노소할 것 없이 모두 여기에 종사하는 것이니, 일에 따라 좋아하고 미워함은 절로 법칙이 있다.
사람의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은 각각 같지 않으니, 진실한 것을 숭상하는 사람은 진실한 것을 좋아하고 허망한 것을 미워하며, 허망한 것을 힘쓰는 사람은 허망한 것을 좋아하고 진실한 것을 미워하며, 선을 하는 사람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며, 불선을 하는 사람은 불선을 좋아하고 선을 미워한다. 그러므로 좋아할 만한 것을 좋아하고 미워할 만한 것을 미워하는 것이 바로 진실되게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사람은 반드시 일이 있는 것이니, 일에 유익한 것이 바로 좋아할 만한 것이요 일에 해로운 것이 바로 미워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좋아할 것인지 미워할 것인지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능히 좋아하고 미워함을 실행하지 못하는 것은 하는 일의 이해를 참으로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니, 만약 참으로 알고 있다면 어찌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진실한 도리를 얻지 못할 것을 걱정하겠는가.
그러나 좋아함이 지나친 것은 그 해독이 얕지만 미워함이 지나친 것은 해독이 깊은데, 좋아하고 미워함에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것이 바로 중도를 얻은 것이다. 좋아하고 미워하는 일에 있어서는 지위와 직업에 따라 좋아하는 바와 미워하는 바가 각각 다르지만,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에 있어서는 귀천이나 중과(衆寡)를 가릴 것 없이 순한 것을 좋아하고 거슬리는 것을 미워하는 것은 누구나 같다.
★(번역본의 출처는, ☞《한국고전번역원, 『기측체의(氣測體義)-추측록(推測錄』/정연탁 (역)1979 》이다. 일부 어려운 한자 용어를 좀 쉬운 말로 몇 군데 첨부하고 그대로 옮겨 추측록 서문은 전부, 나머지는 일부만 발췌하여 정리했다. 원번역본 전체를 보려면 위의 고전번역원링크를 따라가면 된다))
**옮긴이 註: 추측(推測)의 추(推)는 ‘미루다 , 보다, 짐작하다‘, 측(測)은 '재다. 알다'의 뜻이다. 추측록 서문에서 " 본성을 따라 익히는 것이 미룸[推]이며, 미룬 것으로 바르게 재는 것이 헤아림[測]이다"라고 그 뜻을 밝히고 있다. 이로 보건대, 추측이란 이미 드러나 있거나 알고 있는 사실에 "견주어 다른 것을 바르게 헤아리다" 라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하겠다.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으로는 최한기 선생의 사상의 독특함은 근대 서구철학의 주류를 이끌었던 인식론, 즉 객채중심의 관념적 인식론이 아닌 주체중심의 경험적 실증적 인식론이라는 점에 있다고 본다. 최한기 선생은, "물리(物理)에 순응하여 법칙을 따르는 자는 적고, 언제나 자기 소견을 가지고 조작하여 그림자를 참모습으로, 껍데기를 실질로 아는 자가 많다."라고 개탄한다. 곡학아세와 현학에 대한 일침이다. 최한기 선생의 강조하는 추측의 도는 요즘처럼 고상하고 난해한 현학은 많지만 철학은 부재한 시대에 시시비비를 분별하고 자기 성찰과 이해의 좋은 표본과 준칙이 되리라 생각한다.
"대체로 온 세상을 내 몸처럼 여긴다면 대기운화(大氣運化)를 알아야 된다. 온 세상 사람들을 내 몸처럼 여기려면 통민운화(統民運化)를 알아야 된다. 만약 운화(運化)의 일체(一體)가 되는 것은 모르고, 한갓 옛사람들이 전한 바 일체로 삼으라는 말만 전해 듣고 마음에 일치되는 생각만을 가슴 속에 담아두게 되면, 그 생각하는 바가 실제 행동으로 나올 때는 여러 조각으로 마구 흩어져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외적인 것(外物)에 쉽게 흔들리거나 편견과 선입관에 사로잡히어 자기모순에 빠지고 결국 벽에 부딪히고 만다. 그 까닭은 의거할 준칙과 따라갈 법도가 없기 때문이다." --최한기, '운화일체' 중에서-
『벼슬로 서로 유혹하는 사람은 벗이 아니요, 권세와 이익으로 서로 의지하는 사람은 벗이 아니요, 장기 바둑이나 놓고 술이나 마시고 해학하며 떠들썩하게 웃는 사람은 벗이 아니요, 시문(詩文)ㆍ서화(書畫)ㆍ기예(技藝)로 서로 잘한다고 허여하는 사람은 벗이 아니다. 아! 오늘날의 이른바 우도(友道)란 것을 내가 매우 슬퍼하는 바이다. 겸손하고 공손하며 아담하고 조심하며 진실하고 꾸밈이 없으며 명절(名節: 명예와 절조)을 서로 돌아보고 과실(過失)을 서로 경계하며, 담박하여 바라는 바가 없고 죽음에 임하여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 참된 벗이다....가장 두려운 것은 얼굴이 두툼하고 말을 간략하게 하는 소인이다. 그것은 그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워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남의 쟁송(爭訟)을 잘 참견하거나 남의 은밀한 일을 들을 때 가까이 대해서 달콤하게 듣고서 다른 사람에게 퍼뜨리는 것은 소인의 기상 중에서도 심한 것이다. 대저 사람의 심정이란 남의 허물 듣기를 좋아한다. 이런 죄과(罪科)를 범하기 쉬우니, 더욱 성찰(省察)하라.』
-이덕무(李德懋1741~1793), 청장관전서 -사소절 4(士小節 四) -교접(交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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