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분수를 알고 마음을 지키는 사람

이장 대재(李丈 大載)씨가 면천(沔川)에서 나의 해장정사(海莊精舍)에 들러 담소하다가 청하기를, 


“내가 면천에서 객지 생활을 한 뒤로 일찍이 개밋둑이나 달팽이 껍질 같은 집이라도 나 하나 살 만하고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이제 와서야 안간힘을 쓴 끝에 비로소 겨우 들어가 살 만한 소옥(小屋)을 갖게 되어 건조하고 습기찬 것과 춥고 더운 것을 피할 수 있게끔 되었다. 이 집이 비좁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긴 하나 나의 거처로는 안성맞춤이라서 내 입장에서는 대궐 이상으로 느껴지기만 한다.


내가 일찍이 통인(通人 박람다식(博覽多識)한 인물) 권여장(權汝章 권필(權韠))의 말을 들어 보건대 ‘나의 밭을 갈아 먹고 나의 샘을 파서 마시며 내 천명을 지키면서 내 생애를 마치련다.[食吾田 飮吾泉 守吾天 終吾年]’고 하였다. 이 말이 내 마음에 들기에 내가 나름대로 그 뜻을 취해서 내 집의 이름을 ‘사오(四吾)’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해야 내가 이 말대로 할 수가 있겠는가. 그대가 글을 하나 지어 주면 좋겠다.” 하기에, 내가 일어나 응답하면서 그렇게 해 보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대저 세도(世道)가 오염되면서부터 선비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자기 분수를 지킬 줄 모르게 된 지가 오래되었다. 그리고 그중에 가령 자기 분수를 편안한 심경으로 지킬 줄 아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천명에서 일탈되지 않을 수 있는 자는 더욱 드물고, 나아가 이 두 가지에 뜻을 두고 있다 하더라도 오래도록 바뀌지 않을 수 있는 자는 더더욱 드물다고 하겠다. 그러니 자기 밭을 갈아 먹고 자기 우물을 파서 마시며 바른 길로 가려는 뜻을 굳히고는 그 이외의 것은 원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생애를 마치려고 하는 것 같은 자에 대해서는 가령 수사(洙泗 공자(孔子))께서 칭찬하신다 하더라도 어떻게 이보다 더 할 수 있을 것이며 또 과거 역사에서 그렇게 살아간 사람을 일찍이 볼 수 있기라도 했던가.


자기 밭을 갈아 먹으면 식량이 부족하지 않을 것이요 자기 샘을 파서 마시면 마실 물이 부족하지 않을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이 가지려 하고 이익을 취하려 하면서 인간관계에 있어서조차 부귀에만 눈이 어두운 채 위험스러운 상황에 처해도 그만둘 줄을 모르고 있으니, 이렇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는가. 나의 천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들 있기 때문이다.


나의 천명을 지켜야 할 줄을 아는 사람은 이와 다르다. 먹고 마시는 것이 풍족하든 부족하든 망녕되이 구하지를 않고 오직 분수대로 살 뿐이며, 출처(出處)하고 진퇴(進退)하는 사이에 자기 뜻이 굽혀지든 펴지든 제멋대로 기필(期必)함이 없이 오직 만나는 상황에 순응할 따름이다. 이와 같이 생활하게 되면 가령 먹고 살 토지가 없고 마실 만한 샘이 없다 하더라도 어떤 환경에 처한들 자득(自得)하지 않는 경우가 없게 될 것이다.


소계자(蘇季子 춘추시대에 합종설을 주장하여 진나라의 동쪽 진출을 막은 유세가 소진(蘇秦))가 말하기를 ‘가사 나에게 부곽전(負郭田 성 근처의 비옥한 토지)이 2경(頃, 1경은 10,000평)만 있었던들 어떻게 여섯 나라 정승의 인끈을 찰 수가 있었겠는가.’(고관대작이 되자 굽실거리는 친지들을 보고 탄식하며 한 말임)' 라고 하였다.그러나 세상에는 본디 2경의 열 배나 백 배 되는 토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 토지에서 농사지으며 스스로 평안하게 생활하는 자가 적은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하루에 한 번만 물을 길어 오면 넉넉하게 쓰고도 남을 텐데, 이문요(李文饒) 같은 사람은 장안(長安)에서 정승 노릇을 하면서 꼭 혜산(惠山)의 샘물을 길어 오게 하려고 수천 리에 걸쳐 수체(水遞)를 두기까지 하였다.


대저 사람의 욕망으로 말하면 어찌 끝이 있는 것이겠는가.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절제하지 못한다면 천사(千駟 4천 필)의 말과 만종(萬鍾 10만 곡(斛))의 곡식이 있다 하더라도 오히려 밑빠진 독에 물 붓는 격과 같다고나 할 것이다.


지금 대재씨로 말하면 원래가 경사(京師)의 세족(世族) 출신으로서 약장(弱壯)의 나이 때부터 이미 장보(章甫 유생(儒生))들 사이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한 걸음 내디뎌 자기 실력을 과시하기만 하면 청운(靑雲)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불행히도 시대의 운세가 크게 그르쳐지는 바람에 그만 호서(湖西) 연안 지방으로 물러가 살면서 농부나 어부들과 어울려 지내고 있다.


게다가 저습(低濕)한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을 가지고는 끼니를 잇기에도 부족할 것이고 쑥대를 얽어 만든 오두막으로는 비바람을 막기도 어려울 것인데, 이렇듯 불안하기만 한 환경 속에서 그냥 뜨내기로 붙어 살려고만 할 뿐 생애를 마칠 때까지의 생활 방도를 강구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처럼 그지없이 만족하면서 편안한 심경으로 생활을 즐기고 있으니, 도대체 무슨 공부를 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할 것인가. 역시 자신의 천명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일 따름이다.


그리고 가령 대재씨가 훗날 험난한 고개를 넘어 만사가 형통해지고 움츠러들었던 몸이 다시 펴진 결과 따비밭을 개간하던 촌락을 벗어나 조정의 대관(大官)으로 생활을 하게 될 경우라도 바로 이런 도리를 따라 대처한다면 넉넉하여 남음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른바 ‘나의 천명을 지키면서 나의 생애를 마친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어디인들 적용되지 않는 곳이 있다 하겠는가. 사오(四吾)의 표현에 담긴 뜻이 참으로 광대하다 하겠다.


이에 마침내 4장(章) 24구(句)의 시를 지어 이장(李丈)에게 드리면서 집 건물 바람벽에 걸어두도록 청하였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밭갈고 김매어 / 그 결실 수확하네 /배고픈 때 어찌 없으랴마는 /  힘껏 일하며 살아가리라 / 내 밭 갈아 나 먹으니 / 치욕과는 거리 머네 / 퐁퐁 솟아나는 맑고 시원한 물 / 저기에서 길어다 이쪽에 쏟아 붓네 / 우물 차지하려 다투는 저 모습들 /  얼마나 무지한 인생들인가 / 내 우물 파서 내가 마시나니 /  그 누가 와서 다툴 것인가 /  어찌하면 꾸준히 밀고 나갈까 / 어찌하면 거짓없이 살 수 있을까 / 상제에게 품부받은 나의 이 양심 / 어찌 감히 그것을 어길 수 있겠는가 / 내 천명 내가 지켜 / 원래의 본모습 회복하리라 / 내 밭 갈아 밥을 먹고 / 내 우물 파 물 마시며 / 내 천명 내 지키니 / 그 기운 호연토다 / 이렇게 생애 마치리니 / 또 무엇을 구하리요. 


- 장유(張維, 1587~1638), 「사오당시서(四吾堂詩序)」,『계곡집(谿谷集)』제5권-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1994


 “평생 동안 마음을 지킨 것이, 하나는 자긍심을 경계함이며, 하나는 자만을 경계함이며, 하나는 선비의 가난한 마음이며, 하나는 물로 씻어서 깨끗이 하고 싶은 마음이다.(平生守心, 一則戒自矜, 一則戒自大, 一則布衣心, 一則水欲洗. 若知予心.)-석주 권필(權韠, 1569~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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