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필설(筆說 ): 외양만 보고 속마음까지 믿는 어리석음
쥐 과(科)에 속하는 동물로서 색깔이 노란 것을 세상에서 족제비라고 하는데,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의 산속에 많이 서식하고 있다. 그 꼬리 털이 빼어나 붓의 재료로 쓰이는데 황모필(黃毛筆)이라고 불리는 그 붓보다 더 좋은 것은 이 세상에서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내 친구 이생(李生)이 글쓰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어떤 사람에게 부탁해서 그 붓을 얻었는데, 터럭이 빼어나게 가늘고 번질번질 윤기가 흘러 기가 막히게 좋은 붓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붓을 한 번 털어 보니 그 속에 더부룩하게 이상한 점이 느껴지기에 먹을 붓에 적셔 시험삼아 글씨를 써 보니 바로 구부러져 꺾이고 마는 바람에 글자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주의깊게 살펴보니 그 속에 집어넣은 내용물은 대개 개의 터럭으로서 가늘고 윤기가 나는 족제비털을 겉에다 살짝 입혀 놓은 것이었으므로 마침내 경악하며 탄식했다는 것이었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 이생이 나에게 그 이야기를 해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만든 사람은 남을 속여 먹는 재주가 뛰어난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아무도 가짜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간사한 상술(商術)이 통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까지 야박해질 수 있단 말인가.”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자네는 어째서 유독 이런 것만 괴이하게 여기는가. 대저 오늘날의 사대부(士大夫)라고 하는 자들을 보더라도 이 붓과 비슷하지 않은 경우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몸뚱이를 의관(衣冠)으로 감싸고 언어를 그럴 듯하게 구사하면서 걸음걸이도 법도에 맞게 하고 얼굴색 역시 근엄하게 꾸미고 있으니, 그들을 바라보면 모두 군자(君子)나 정사(正士) 같게만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급기야 남이 보지 않는 곳에 있으면서 이해 관계가 걸린 상황을 만나게 되면 평소의 뜻을 완전히 바꿔 욕심을 마구 부리며 마음속으로 불인(不仁)한 마음을 품고 불의(不義)한 행동을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할 것이다.
대체로 뛰어난 듯 번드르르하게 외양을 장식했지만 그 속은 온통 개의 털로 채워져 있는 것이 이 붓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데, 그들을 살피는 사람들이 제대로 눈여겨보지 않은 채 외양만 보고서 속마음까지 믿어 버리기 때문에 간사한 사람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어도 뉘우쳐 바꾸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 자네가 이런 점은 걱정하지 않고 붓에 대해서만 괴이하게 여기고 있으니, 이 역시 유추(類推, 미루어 짐작함)할 줄을 모른다고 해야 하겠다.” 하니, 이생이 좋은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 이에 그 이야기를 기록해 두는 바이다.
- 장유(張維, 1587~1638), '가짜 붓 이야기(筆說 필설)'『계곡집(谿谷集)』제4권/설(說) 10수-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1994
'고전산문 > 계곡 장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전산문] 졸(拙)이라는 글자에 담긴 뜻(용졸당기) (0) | 2018.03.16 |
---|---|
[고전산문]답인논문(答人論文): 문장을 논한 것에 답함 (0) | 2017.12.28 |
[고전산문] 군자가 세속의 유행을 따름에 대하여 (0) | 2017.12.28 |
[고전산문] 마음쓰는 일을 멈춰서는 안된다 (0) | 2017.12.28 |
[고전산문]곡목설(曲木說):사람의 본성과 나무의 속성은 본질에서 다르다 (0) | 2017.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