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졸(拙)이라는 글자에 담긴 뜻(용졸당기)

백마강(白馬江)이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가림군(加林郡) 남쪽 지점에 이르러 남당강(南塘江)이 되는데, 이 강 연안에 당우(堂宇) 한 채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산림이 울창하게 우거진 데다 너른 들판 또한 볼 만한 경치를 제공해 주고 있는데, 이 집이 바로 민 관찰 사상(閔觀察士尙,사상은 민성휘(閔聖徽)의 자(字)임)씨의 별장(別莊)이다.


사상이 호남에서 치서(馳書, 급히 보낸 편지)하여 나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세상살이에 서툰 것으로 말하면 비둘기* 정도일 뿐만이 아니다. 벼슬살이 20년에 왕명을 받들고 방백(方伯)이 되기까지 하였는데, 달팽이 껍질 같은 집이라도 몸을 가릴 만한 처소 하나 여태 마련하지를 못하였다. 


그러다가 지난해 영남 지방의 관찰사를 그만두고 나서야 비로소 이곳에 터를 잡고 집을 지었는데, 그야말로 외지고 누추하기 그지없긴 하나, 그래도 내 마음은 즐겁기만 하여 관직을 물러난 뒤엔 여기서 살며 생을 마칠 계획으로 있다.


삼가 생각건대, 선군자(先君子)께서 일찍이 당우의 편액(扁額)을 내거시면서 ‘양졸(養拙)’이라 하셨는데, ‘수졸(守拙)’과 ‘지졸(趾拙)’이 또 백형(伯兄)과 막내 아우의 자호(自號)이고 보면, 이 졸(拙)이란 글자야말로 우리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심결(心訣)인 듯도 싶다. 그래서 나 역시 용졸(用拙)이라는 글자를 가지고 집의 이름으로 삼으려 하는데, 나를 아는 이로는 그대만한 사람이 없으니, 한마디 말을 하여 이에 대한 뜻을 드러내 주었으면 한다.” 하기에, 내가 쾌히 응락하였다.


그런데 이에 대한 글을 작성하려 할 즈음에 어떤 이가 문제를 제기하기를, “어떤 실상이 있고 난 뒤에야 그에 따른 이름이 붙여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글이라는 것도 그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사상(士尙)씨 같은 이로 말하면 세상에서 재지(才智)가 있는 신하라고 일컬어지고 있지 않은가. 번화한 고을의 수령으로 나가고 큰 지방의 방백으로 있을 때 치적(治績)이 으뜸으로 손꼽혔었고, 근밀(近密)한 자리에서 입시(入侍, 조정에서 임금을 뵘)할 때나 변진(邊鎭, 변방의 국경지역)을 맡아 다스릴 때 어디에서고 직책에 걸맞게 임무를 수행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가 일을 시행하고 결단을 내림에 있어서는 어떤 일을 만나든 바람 소리가 휙휙 나면서 마치 예리한 칼로 물건을 베듯 하고 최고급의 사마(駟馬, 수레를 끄는 힘세고 강한 말)가 치달리듯 하였으므로, 임금도 그 재질을 인정하고 제공(諸公)도 능력 면에서 그에게 양보하곤 하였다. 그러니 가령 사상이 어리숙하다는 것으로 아무리 자처하려 한들 그 누가 이것을 정말로 믿겠는가. 그런데 지금 그가 억지를 부리며 졸(拙)로 자기의 이름을 삼은 상황에서 그대가 또 기어이 이에 대한 글을 쓴다고 한다면, 실상에 이름이 수반되고 바탕 위에서 글이 성립된다는 측면에서 살펴볼 때 너무도 동떨어진 일이 아니겠는가.”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졸(拙)에 대해서 그대가 논하는 것이 어쩌면 그리도 천박한가. 대저 졸(拙)의 반대는 교(巧)라고 할 것인데, 그대만 유독 세상의 교자(巧者,교활하고 세속의 처세에 능한 사람)를 보지 못한단 말인가. 말은 어물쩍 넘겨 버리기 일쑤이고 행동은 지위(脂韋, 기름과 무두질한 가죽, 즉 낮짝이 두껍고 뺀실거리며 아첨질과 세속의 이익과 부침에 밝은 것을 비유) 같으며, 남들이 피해 다니는 길목에는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않은 채 어떻게 해서든 안전지대에서만 처신하려 안달한다.


그런 자가 관직을 얻고 나서는 성쇠(盛衰, 흥하고 망함)의 기미를 잘 살펴 이랬다 저랬다 행동을 뒤바꾸고, 그저 형식적으로만 처리하여 입막음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며, 신명을 다 바쳐 자기 뜻을 관철하는 것은 할 짓이 못 된다며 비웃곤 한다. 이것이 바로 교자(巧者)들의 행태인데, 사상(민성휘)에게 이 중 하나라도 그런 요소가 있기나 하던가.


사람들이 쓰다고 뱉는 것을 홀로 꿀꺽 삼키고, 사람들이 몰려갈 때 그만은 혼자서 등돌린다. 자기 몸 위하는 것은 어리숙하나 나라 보답하는 일엔 온 정력을 기울이고, 이익을 좇는 일에는 겁내면서도 의리를 행함엔 용맹스럽다. 그래서 죽도록 일 시키며 정신없이 뛰어다니게 한다 해도 감히 혼자만 고생한다며 한을 품지 않을 그런 인물인 것이다.


대개 그의 평소 행적을 객관적인 안목으로 살펴보건대, 어느 일 하나 교자(巧者)와는 상반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이 졸(拙)이라는 글자를 가지고 또 그의 집 이름을 삼았고 보면 정말 졸(拙)한 그의 성품이 흘러넘친다 하겠다.”

하였다. 


그러나 정작 내 생각에는, 사상(민성휘)이 졸(拙)이라는 글자를 취한 이면에는 뭔가 이유가 분명히 있으리라고 여겨진다. 일찍이 내가 듣건대, 둔중함은 예리함의 바탕이 되고 고요함은 움직임의 뿌리가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옛날의 군자들을 보면, 광채를 속에 간직하고 활용을 잠시 유보한 채, 지혜로우면서도 바보처럼 행동하고 달변의 소유자이면서도 어눌한 듯 말하면서, 스스로 굽혀 장차 펼 기회에 대비하고 뒤에 머물러 있는 것을 앞장선 것으로 여겼는데, 이처럼 속에 온축된 것이 항상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밖으로 내놓을 때가 되면 무한정하게 쏟아져 나오곤 하였던 것이었다.


사상(민성휘)의 아름다운 재질로 말하면, 세상 사람들 가운데 그보다 앞설 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총명함으로 볼 때 무엇이든 비춰 보지 못하는 것이 없을 텐데도 그 총명을 다 발휘하지 않은 채 꼭 안으로 거두어 모르는 척하고, 그의 용맹성으로 볼 때 과감하게 나서지 못할 일이 없을 텐데도 그 용맹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않은 채 꼭 나약한 듯 일을 처리해 버리곤 한다. 이렇듯 막야(莫邪)와 같은 명검(名劍)을 쥐고 있으면서도 휘두르지 않는 때가 있고, 섬려(纖驪)처럼 빠른 발을 갖고 있으면서도 치달리지 않는 때가 있고 보면, 내 속에 들어 있는 것이 늘 여유작작하기만 하여 어떤 세상 일이든 처리하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대저 그렇다고 한다면, 그가 졸(拙)을 취하려 하는 것은 교(巧)하지 못해서가 아니요 교하면서도 그것을 쓰지 않으려고 하는 점이 있어서라고 해야할 것인데, 교(巧)하면서도 쓰지 않는 점이 있어야만 천하의 대교(大巧)라는 차원에 진입할 수가 있는 법이다. 사상 정도의 인물이라면 본디 이런 일을 넉넉히 해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또한 더욱 힘쓰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돌아가신 부친의 가르침에 근본하였고 보면 계술(繼述 선조의 뜻을 이어받아 발전시키는 것)하는 의미를 그가 얼마나 중하게 받아들였는지를 알 수가 있고, 형제의 자호(自號)와 같이하였고 보면 그가 얼마나 훈지(塤篪 질나팔과 저로, 형제 사이를 말함)의 화목함을 도모하려 하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러고 보면 당우(堂宇)에 명호(名號)를 붙이는 의리로 볼 때 얼마나 아름답게 되었다고 하겠는가. 그런데 그곳 강산의 승경(勝景, 뛰어나게 좋은 경치)과 경물(景物, 계절따라 변화하는 경치)의 번화함에 대해서는 내가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서 자세히 알 수가 없기에 지금은 우선 언급하지 않기로 하였다.


-장유(張維, 1587~1638), '용졸당기(用拙堂記)',『계곡집(谿谷集)/계곡선생집 제8권 / 기(記) 19수(首)』-


※[역자주]

1. 내가 세상살이에 서툰 것으로 말하면 비둘기정도일 뿐만이 아니다처세술(處世術)에 어두워 어리숙하기만 하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소남(召南) 작소(鵲巢)에 “까치가 지은 집에 비둘기가 들어 사네.[維鵲有巢維鳩居之]”라고 하였는데, 비둘기는 원래 성격이 졸렬하여 집을 짓지 못한 채 까치집을 빌려 살기도 한다고 한다.


▲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1994


"못남(拙)의 쓰임을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얄팍한 지혜를 써서 스스로의 사리(私利)를 밝히는 자에 비한다면 본디 차이가 있으나, 군자의 지닌 바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마음을 다하고 본성을 알며 몸을 닦고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못난 자(拙者)가 해낼 수 있는 바가 아니다...사람을 관찰할 때는 그 바깥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보는 것이다."-김장생(金長生, 1548~1631) '용졸당기(用拙堂記)'『사계전서(沙溪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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