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재주와 재능만으로 사람됨을 알 수 없다

소인 중에는 재주가 몹시 뛰어난 자가 많아 군자도 혹 그만 못하다. 당나라의 소인으로는 이임보(李林甫), 노기(盧杞)만 한 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임보의 지략은 안녹산(安祿山)도 두려워하는 바였으니, 이임보가 죽지 않았더라면 안녹산은 틀림없이 반역하지 못했을 것이다. 노기가 덕종(德宗)에게 인정을 받은 것은 괵주(虢州)의 돼지 때문이었으니, 그의 말은 참으로 재상의 기국이 있었다.


송나라는 소인들이 모두 재주 있는 자들이었다. 정위(丁謂)가 조회하러 들어가자 진종(眞宗)이 크게 진노하여 어떤 이에게 심한 벌을 내리려 하였으나, 정위는 묵묵히 아무 말도 않고 있었다. 진종이 그 까닭을 묻자 정위가 차분하게 대답하기를, “천노(天怒)가 진동하실 때에 신이 한마디 보탰다가는 저 사람이 그 자리에서 박살이 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진종이 이 말을 듣고 노여움을 거두었으니 인자(仁者)의 말도 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간사하다고 지목받는 것은 내공(萊公 구준(寇準))을 모함한 것 때문이다. 그러나 내공이 귀양 가게 된 것을 전적으로 정위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내공은 진종이 병든 것을 기화로 유후(劉后)를 폐하고 인종(仁宗)을 세워 진종을 태상황(太上皇)으로 높이려 하였는데, 술에 취해 이를 누설하여 정위에게 틈을 주고 말았다. 그나마 송나라 군주의 인후함에 힘입어 귀양 가는 정도로 그쳤던 것이다.


여혜경(呂惠卿)은 반복무상한 소인이다. 그러나 전운사(轉運使)로 섬서(陝西)에 가던 중에 이천(伊川)의 집을 지나게 되었는데, 종자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는데도 쥐 죽은 듯이 조용하게 지나가 한참 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이천도 그의 재주에 감탄하였다.


장돈(章惇)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흉악한 권신이다. 그러나 철종(哲宗)이 죽고 나서 황태후가 후사를 정할 적에 “단왕(端王)은 경박하여 천하를 맡길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니, 만약 장돈의 말을 따랐다면 송나라에는 정강(靖康)의 화가 없었을 것이다.


진회(秦檜)가 정승이 되자 국가의 기강이 다소 확립되었으니 주자(朱子)도 그가 기골(氣骨)이 있다고 인정하였다. 만약 무목공(武穆公 악비(岳飛))을 죽이지 않았다면, 금나라와 화의하자고 주장한 것이 진회뿐만이 아니었으니 오로지 그만 비난할 수 있겠는가?


가사도(賈似道)가 악주(卾州)를 수비하면서 하룻밤 만에 귀신처럼 목책을 완성하니 원 세조(元世祖)가 경탄하며, “어찌하면 가사도와 같은 자를 얻어 장수로 삼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태묘(太廟)에 난 불을 끌 때에 군율로 조사(朝士)들에게 명령하자 이를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그의 재주가 남보다 크게 뛰어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들은 모두 치세의 유능한 신하가 될 수 있었는데, 다만 그들을 다루기를 잘못하였을 뿐이다.


우리나라의 남곤(南袞)은 처음에는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와 명망이 동등하였으며 문장도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과 견줄 정도였으나 결국 간사함에 빠졌으니, 이는 한 번 생각을 잘못 먹은 데서 기인하였다. 김안로(金安老)는 하루 종일 어깨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단정하게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가 피곤해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였고 죽은 것도 세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만약 권력을 전단한 죄가 없었다면 누가 그를 소인이라 지목하겠는가?


그러나 소인은 군자에 비해 재주뿐만 아니라 언변도 좋고 힘도 좋고 일도 잘한다. 그에게 일을 맡기면 반드시 해내니, 군주라면 누군들 그에게 일을 맡기고 싶지 않겠는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마음이다. 그러나 그 흔적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니 미리 억측할 수 있겠는가? 그의 죄악이 모두 노출된 다음에는 국사가 이미 잘못되어 어찌 해 볼 수가 없으니, 비록 그를 처벌하고 죽이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군주는 처음에 등용하는 것을 신중히 하는 것이다.


<역자註>

1.노기(盧杞) : 노기(盧杞)가 괵주 자사(虢州刺史)로 있을 때 괵주의 관용 돼지 3000마리가 백성들의 근심거리가 되고 있다고 상주하였다. 덕종(德宗)이 이를 사원(沙苑)으로 옮기라고 명하자 노기가 “그곳에도 폐하의 백성들이 있습니다. 차라리 먹어치우는 것이 낫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덕종은 “괵주를 맡고 있으면서 다른 주를 근심하니 재상감이다.”라고 하고 조서를 내려 돼지를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어 먹이게 하였다. 《新唐書 卷233下 盧杞傳》

2. 여혜경(呂惠卿): 여혜경은 자는 길보(吉甫)로 희령(熙寧) 초에 왕안석(王安石)이 정권을 잡았을 때 실무에 어두운 그를 대신해 대소사를 맡아 처리하였으나 나중에 왕안석의 동생 왕안국(王安國) 때문에 사이가 나빠져 왕씨를 해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하였다. 그러다 후에 한강(韓絳)이 재상이 되어 제어하기 어려워지자 다시 왕안석을 등용할 것을 청하여 함께 일하였다. 《宋史 卷471 呂惠卿傳》

3. 단왕(端王) : 단왕은 휘종(徽宗)을 말한다. 그는 철종의 동생으로 후사 없이 죽은 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도교를 신봉하여 여기저기에 도관을 짓는 등 많은 토목 공사를 일으키고 사치와 향락을 일삼아 백성의 원망을 샀다. 선화(宣和) 7년에 금(金)나라가 침략해 오자 태자에게 전위하고 자신은 태상황이 되었다. 《宋史 卷19 徽宗本紀》

4.정강(靖康)의 화 : 정강 2년 금군(金軍)이 남하하여 송나라 도성인 변경(汴京)을 함락하고 휘종(徽宗)과 그의 아들 흠종(欽宗)을 잡아 북쪽으로 끌고 간 일을 말한다. 이로 인해 남쪽으로 천도하여 남송(南宋)이 되었다.


<옮긴이 註> 

1. 남곤(南袞 1481~1537): 문신. 학자로 명망이 높았으나, 1519년 기묘사화때 신흥귀족형 관료기득권정치세력인 훈구파에 붙어서 조광조등을 숙청하는데 동조하여 권세를 누린 인물로 조선 사림역사에 변절자. 배신자, 소인배의 전형으로 낙인이 찍혔다..

2.김안로(金安老, 1471~1527): 대표적인 귀족형 기득권 관료 문신으로 한때 기묘사화 등 당쟁으로 수차례 남곤일파의 숙청에서 살아남아 유배당하기도 하였는데, 다시 권력암투로 권세를 얻자 남곤세력을 숙청하였고, 뒤이어 사림파와 왕의 외척인 윤원형일파까지 숙청하는데에 성공하여 세도를 누린 인물이다. 


-성대중(1732~1809 ), 『청성잡기 제 4권/성언(醒言)』-


▲원글출처:ⓒ 한국고전번역원 ┃ 김혜경 오윤정 (공역)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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