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 사실에 의거하여 옳은 진리를 찾는다

《한서(漢書)》 하간헌왕전(河間獻王傳)에 이르기를,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實事求是]” 하였는데, 이 말은 곧 학문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도리이다. 만일 사실에 의거하지 않고 다만 허술한 방도를 편리하게 여기거나, 그 진리를 찾지 않고 다만 선입견(先入見)을 위주로 한다면 성현(聖賢)의 도에 있어 배치(背馳)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한유(漢儒, 중국의 유학자)들은 경전(經傳)의 훈고(訓詁, 경서(經書)의 고증, 해석, 주해를 통틀어 이르는 말)에 대해서 모두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것이 있어 정실(精實, 구체적이고 실제적임)함을 극도로 갖추었고, 성도인의(性道仁義) 등의 일에 이르러서는 그때 사람들이 모두 다 알고 있어서 깊이 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많이 추명(推明, 추리하여 뜻을 밝힘)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연히 주석(注釋)이란 것이 있으니 이것은 진정 사실에 의거하여 그 진리를 찾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진(晉) 나라 때 사람들이 노자(老子)ㆍ장자(莊子)의 허무(虛無)한 학설을 강론하여 학문을 게을리하는 허술한 사람들을 편리하게 함으로부터 학술(學術)이 일변(一變)하였고, 불도(佛道)가 크게 행해짐으로써 선기(禪機)의 깨닫는 바가 심지어 지리해서 추구하여 따질 수도 없는 지경이 됨에 이르러서 학술이 또 일변하였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다만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는 한마디 말과 모두가 상반(相反)되었기 때문이다.


그후 양송(兩宋 북송(北宋) 시대와 남송(南宋) 시대를 합칭한 말)의 유자(儒者)들은 도학(道學)을 천명하여 성리(性理) 등의 일에 대해서 정밀하게 말해 놓았으니, 이는 실로 고인(古人)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한 것이다. 그런데 오직 육왕(陸王) 등의 학파(學派)가 또 실없는 공허(空虛)를 밟고서 유(儒)를 이끌어 석(釋)으로 들어갔는데, 이는 석을 이끌어 유로 들어간 것보다 더 심한 것이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학문하는 도는 이미 요순ㆍ우탕ㆍ문무ㆍ주공(堯舜禹湯文武周孔)을 귀의처(歸依處)로 삼았으니, 의당 사실에 의거해서 옳은 진리를 찾아야지, 헛된 말을 제기하여 그른 데에 숨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학자들은 훈고를 정밀히 탐구한 한유(漢儒)들을 높이 여기는데, 이는 참으로 옳은 일이다. 다만 성현의 도는 비유하자면 마치 갑제 대택(甲第大宅, 겹겹이 담으로 둘러쌓인 큰집)과 같으니, 주인은 항상 당실(堂室)에 거처하는데 그 당실은 문경(門逕)이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런데 훈고는 바로 문경이 된다. 그러나 일생 동안을 문경 사이에서만 분주하면서 당(堂)에 올라 실(室)에 들어가기를 구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끝내 하인(下人)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학문을 하는 데 있어 반드시 훈고를 정밀히 탐구하는 것은 당실을 들어가는 데에 그릇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요, 훈고만 하면 일이 다 끝난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특히 한 나라 때 사람들이 당실에 대하여 그리 논하지 않았던 것은 그때의 문경이 그릇되지 않았고 당실도 본디 그릇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진(晉)ㆍ송(宋) 이후로는 학자들이 고원(高遠, 고상하고 추상적인)한 일만을 힘쓰면서 공자(孔子)를 높이어 ‘성현의 도’가 이렇게 천근(淺近, 깊숙한 맛이 없이 얕음)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며, 이에 올바른 문경을 싫어하여 이를 버리고 특별히 초묘 고원(超妙高遠, 매우 오묘하거나 고상하고 추상적인)한 곳에서 그것을 찾게 되었다. 그래서 이에 허공을 딛고 올라가 용마루[堂脊] 위를 왕래하면서 창문의 빛과 다락의 그림자를 가지고 사의(思議, 생각하여 헤아림)의 사이에서 이를 요량하여 깊은 문호와 방구석을 연구하지만 끝내 이를 직접 보지 못하고 만다.


그리고 혹은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좋아하여 갑제(甲第, 크고 너르게 아주 잘 지은 집)에 들어가는 일을 가지고 ‘갑제가 이렇게 얕고 또 들어가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어 별도로 문경을 열어서 서로 다투어 들어간다. 그리하여 이쪽에서는 실중(室中)에 기둥이 몇 개라는 것을 말하고, 저쪽에서는 당상(堂上)에 용마루가 몇 개라는 것을 변론하여 쉴새없이 서로 비교 논란하다가 자신의 설(說)이 이미 서린(西隣)의 을제(乙第)로 들어간 것도 모르게 된다. 그러면 갑제의 주인은 빙그레 웃으며 이르기를, “나의 집은 그렇지 않다.” 고 한다.


대체로 성현의 도는 몸소 실천하면서 공론(空論)을 숭상하지 않는 데에 있으니, 진실한 것은 의당 강구하고 헛된 것은 의거하지 말아야지, 만일 그윽하고 어두운 속에서 이를 찾거나 텅 비고 광활한 곳에 이를 방치한다면 시비를 분변하지 못하여 본의(本意)를 완전히 잃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하는 방도는 굳이 한(漢)ㆍ송(宋)의 한계를 나눌 필요가 없고, 굳이 정현(鄭玄)ㆍ왕숙(王肅)과 정자(程子)ㆍ주자(朱子)의 장단점을 비교할 필요가 없으며, 굳이 주희(朱熹)ㆍ육구연(陸九淵)과 설선(薛瑄)ㆍ왕수인(王守仁)의 문호를 다툴 필요가 없이 다만 심기(心氣)를 침착하게 갖고 널리 배우고 독실히 실천하면서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는 한마디 말만을 오로지 주장하여 해나가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역자 註>

1.육왕(陸王) : 송(宋) 나라 육구연(陸九淵)과 명(明) 나라 왕수인(王守仁)을 합칭한 말인데, 이들의 학문의 종지(宗旨)는 선(禪)에 가까운 것이 서로 비슷하므로 이렇게 일컫는다.

2.정현(鄭玄): 정현은 후한(後漢) 때의 경학자(經學者)이고 왕숙(王肅)은 위(魏)의 경학자이다. 왕숙은 특히 가규(賈逵)와 마융(馬融)의 학을 좋아하고 정현의 학을 싫어하였다.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경우는 특히 《주역(周易)》에서 정자의 전(傳)과 주자의 본의(本義)가 서로 상당한 차이점이 있음을 의미한 말이다.


-김정희(金正喜,1789~1856),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 완당전집(완당전집(阮堂全集)) 제1권 / 설(說)-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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