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세한도 발문(歲寒圖 跋文): 진정한 벗

그대가 지난해에 계복의 『만학집 晩學集』과 운경의 『대운산방문고大運山房文庫』두 책을 부쳐주고, 올해 또 하장령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120권을 보내주니, 이 모두는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다. 천리 만리 먼 곳에서 사온 것이고, 또 여러 해에 걸쳐서 얻은 것이니, 한번에 가능할 수 있는 일은 더욱 아닌 까닭이다. 


지금의 도도하고 각박한 세상 인심은 나도나도 권세와 이득을 쫒아 제 잇속만을 챙기는 이기적인 풍조가 온통 휩쓸고 있는데, 세상 풍조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서책을 구하는 일에 마음을 다하고 힘쓰기를 이처럼 애써 하면서도, 그대에게 권세와 이득을 보장해 줄만한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 저멀리 초췌하게 야위고 초라한 이 사람에게 건네주기를 마치 세상사람들이 제 잇속을 챙기듯이 하였구나! 


태사공 사마천이 말하기를 "권세와 이익으로 결합한 자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관계도 멀어진다(以權利合者 權利盡以交疎)" *고 하였다.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하고 각박한 흐름 속에 처하여 사는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대는 세상 풍조의 바깥으로 초연히 몸을 빼내었구나! 이는 그대가 권세와 이익을 쫒는 세상의 이해관계로 나를 대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태사공의 말씀이 잘못되었는가?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진 연후에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나중에 시듦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 고 하셨다. 소나무, 잣나무는 본래 사계절 상관없이 잎이 시들지 않고 지지도 않는다. 추운 계절이 오기 전에도 같은 소나무, 잣나무요, 추위가 닥친 후에도 여전히 같은 소나무, 잣나무다. 그런데도 성인께서는 굳이 추위가 닥친 다음의 그것을 가리켜 칭찬하셨다. 

  

이제 그대가 나를 대하는 처신을 돌이켜보면, 그 이전이라고 지금보다 더 잘한 것도 없지만, 그 이후라고 해서 지금만큼 못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예전의 그대에 대해서는 따로 일컬을 것이 없지만, 그 이후에 그대가 나에게 보여준 태도는 역시 성인에게서도 칭찬 받을 만한 일이 아닌가? 


성인이 유독 추운 계절의 소나무, 잣나무를 강조하신 것은, 단지 시들지 않는 나무의 곧고 굳센 절조와 절개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날씨가 추워진 그 상황 그 상태를 보시고 따로 마음에 느끼신 바가 있었던 것이다. 

  

아아! 전한 시대와 같이 풍속이 아름다웠던 시절에도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처럼 어질고 선한 사람조차 그들이 처한 형편에 따라 빈객(賓客)들이 모였다가는 흩어지곤 하였다. 하물며 하규현(下邽縣)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써붙였다는 글씨 같은 것은 세상 인심의 박절함이 극에 다다른 표지가 아니고 무엇이랴.  슬프다! 완당 노인이 쓰다.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세한도발문(歲寒圖 跋文)-


※참조: 원문은 익구닷컴과 원용석 선생의 인터넷에 공개된 글을 참고하였고, 번역글은 익구닷컴, 원용석선생, 김동석선생의 번역글을 참고하여 나름 맥락에 맞추어 정리하였다. 말이 참고지 거의 표절하고 짜깁기했다.


※옮긴이 주

1.태사공 사마천이 말하기를: 사기 권42 「정세가(鄭世家)」의 사마천의 논평이다.“속담에 ‘권세와 이익으로 결합한 자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관계도 멀어진다(以權利合者 權利盡以交疎)’고 했다. 보하(甫瑕)가 이랬다. 보하는 정자(鄭子)를 살해하고 여공(厲公)을 맞아들였지만, 여공은 끝내 배신하여 그를 죽였다. 이것이 진(晉)나라의 이극(里克)과 무엇이 다른가? 순식(荀息)은 절개를 지키고 자기 몸은 죽었지만 해제(奚齊)를 보전하지는 못했다. 변고의 발생은 여러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김영수 역)”

2.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 『사기(史記)』 급정열전(汲鄭列傳)에 나온다. 전한(前漢) 무제 때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라는 어진 현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벼슬자리에 있을 때는 손님이 넘치다가 좌천되었을 때는 손님의 발길이 뚝 끊겼다. 사마천은 “급암(汲黯)이나 정당시(鄭當時)와 같이 어진 덕행을 지닌 자에게 권세가 있으면 빈객들이 열 배로 늘어나고, 권세가 없으면 상반되었다. 하물며 보통 사람이면 오죽하겠는가! ”라고 평했다. 

3.적공(翟公): 『사기(史記)』 급정열전(汲鄭列傳)의 마지막 사마천의 논평에 나온다. 적공(翟公) 또한 벼슬에서 해임되자 마찬가지 현상이 벌어졌다. 집이 한산하다 못해 문 앞에 새 그물을 쳐 놓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여기서 문전작라(門前雀羅), 문전가설작라(門前可設雀羅)라는 고사성어가 유래된다. 적공이 다시 관직에 오르자 손님이 다시 몰려와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를 본 적공은 염량세태를  한탄하여 풍자하는 글을 써서 대문에 붙였다. "한번 죽고 한번 삶에 사귐의 정을 알고(一死一生 乃知交情), 한번 가난하고 한번 부유함에 사귐의 태도를 알며(一貧一富 乃知交態), 한번 귀하고 한번 천함에 사귐의 정이 드러나는구나(一貴一賤 交情乃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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