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게으름 병
내가 게으른 병이 있어서 이것을 객(客)에게 알리기를, “이렇게 바쁜 세상에 나는 게으름뱅이로 작은 몸 하나도 제대로 지탱해 나가지 못하며, 집이라고 하나 있는데도 게을러서 풀도 매지 아니하고, 책이 천 권이나 있는데 좀이 생겨도 게을러서 펴보지 아니하며, 머리가 헝클어져도 게을러서 빗지 아니하며, 몸에 병이 있어도 게을러서 치료하지 아니하며, 남과 더불어 사귀는데도 게을러서 담소하며 노는 일이 적으며, 사람들과 서로 왕래하는데도 게을러서 그 왕래가 적으며, 또 입은 말을 게을리하고, 발은 걸음을 게을리하며, 눈은 보는 것을 게을리하여, 땅을 밟든지 일을 당하든지 간에 무엇에든지 게으르지 않는 것이 없는데, 이런 병을 무슨 재주로 낫게 하겠는가?”
하고 말을 하니, 객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물러가더니 이 게으른 병을 낫게 해주려고 열흘쯤 지나 다시 와서 말하기를, “요사이 오래 보지 못해 심히 그립구나. 한번 보고 싶어 왔네.” 하였다.
그런데 나는 게으른 병 때문에 다시 상면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굳이 청해 보고는 말하기를, “내가 오래 거사의 부드러운 웃음과 심오한 말을 듣지 못했는데, 지금은 모춘(暮春)이라 새가 동산에서 지저귀고, 날씨가 화창하며, 여러 가지 꽃이 번성한 때이요, 내게 옥저(玉蛆 흰 밥알)가 뜨는 좋은 술이 있어 그 향기가 방에 가득 차고, 그 술기운이 독에 꽉 찼는데, 혼자서 잔질하기가 마음에 미안쩍은데 그대가 아니면 누구와 같이 마시겠는가?
집에는 시중드는 아이가 있어서 소리를 잘하고 생황을 잘 불며, 또 비파를 잘 타니, 차마 혼자서는 듣기가 아까워 선생을 기다리노라. 그러나 선생이 가기를 꺼릴까 염려되오. 잠깐 갈 생각이 없는가.” 하였다.
나는 좋아서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즉시 일어나서, “그대가 나를 노쇠했다고 버리지 않고, 맛좋은 술과 세상에 드문 자색(姿色)으로 답답한 마음을 위로하려고 하니, 내가 어찌 굳이 사양하겠는가?” 하고, 서두르면서 허리띠를 매는데도 늦을까 걱정하고, 신을 신는데도 더딜까 염려하여 급급히 나서서 가려 하니, 객이 홀연히 게으른 자태로써 우물쭈물하면서 대답을 하지 않더니, 조금 있다가 다시 번복하여 말하기를,
“선생이 이미 이 청을 승낙하였으니, 고칠 수는 없으나 선생이 전에는 말이 게으르더니 지금은 말이 급하고, 전에는 돌아보는 것이 게으르더니, 지금은 돌아보는 것이 조심스러우며, 전에는 걸음이 게으르더니, 지금은 걸음이 빠르니, 아마도 선생의 게으른 병은 오늘로부터 다 나은 것 같소. 그런데 성품을 해롭게 하는 도끼로서는 색(色)이 가장 심하고, 창자를 상하게 하는 약으로는 술(酒)이라 이르는데, 선생이 여기에만 게으름이 해이해짐을 깨닫지 못하고, 급히 가려는 태도는 마치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마치 사람이 저자에 가는 것같으니, 아마 선생이 지금 이대로 가게 되면, 그 본성을 훼손시키며, 몸을 패망시키기에 이르고 말 것이라고 생각하오. 나는 선생이 이렇게 되는 광경을 보기 싫어서 축연(蹙然)히 선생과 말하기도 게을러지며, 같이 앉기도 게을러지오. 생각하건대 선생의 게으른 병이 내게 옮겨지지는 않았습니까.” 하였다.
나는 낯빛이 붉어지고 이마에 땀이 났다. 그에게 사과하여, “착하도다, 그대가 내 게으름을 풍자함이여. 내가 종전에 그대에게 게으른 병이 있다고 말을 하였는데, 지금 그대의 말을 들으니, 그림자가 사람을 따르는 것보다 더 빨리 그 게으름이 나도 모르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나는 이제 비로소 기욕(嗜欲, 향락을 탐내는 것, 정도를 넘어선 욕망)이 사람에게 그 마음을 움직임이 빠르고, 그 귀에 들어옴이 순한 줄을 알았다.
이것을 미루어보면, 기욕이 몸에 화를 주는 것이 지독하게 빠르니, 진실로 삼가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앞으로 이 마음을 옮겨서 인의(仁義)의 집에 들어가, 그 게으름을 버리고 인의에 힘쓰려고 하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조금 기다리고 나를 조롱하지 말아주오.”라고 말하였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 '게으름을 풍자하다[慵諷 용풍]', 동문선 제107권/ 잡저(雜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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