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돌(石)의 비웃음에 답하다
커다란 돌이 나에게 묻기를, “나는 하늘이 낳은 것으로 땅 위에 있으니, 안전하기는 엎어놓은 동이와 같고 견고하기는 깊이 박힌 뿌리와 같아, 물(物, 물질이나 재물같은 외적인 것 또는 외면적인 것)이나 사람으로 인하여 이동되지 않아서 그 천성을 보전하고 있으니 참으로 즐겁다. 자네도 역시 하늘의 명을 받아 태어나서 사람이 되었으니, 사람은 진실로 만물 중에서 신령한 것인데, 어찌 그 몸과 마음을 자유 자재하지 못하고 항상 물(物)에게 부림받는 바가 되고 사람에게 끌린 바가 되어, 물(物)이 혹 유혹하면 거기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물(物)이 혹 오지 않으면 우울하여 즐거워하지 않으며, 사람이 좋아하면 지기를 펴고 사람이 배척하면 지기가 꺾이니, 본래의 진상을 잃고 특별한 지조가 없기로는 자네와 같은 것이 없네. 대저 만물 중에 신령한 것이 역시 이와 같은가?” 하기에,
나는 웃으면서 답하기를, “너와 같은 물건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는가? 불서(佛書)에도 또한 이르기를 ‘우둔하고 어리석은 정신이 화해서 목석(木石)이 된다.’ 하였다. 그렇다면 너는 이미 신령한 정기와 청정한 광명을 잃고 이 딱딱한 돌덩이로 타락한 것이다. 더구나 화씨(和氏)의 박(璞)이 쪼개지자 너도 함께 쪼개졌고, 곤강(崑岡)의 옥(玉)이 불에 타자 너도 함께 탔음에랴. 그뿐만 아니라, 또 내가 만일 용을 타고 하늘에 오를 적에는 너는 반드시 나를 위해 디딤돌이 되어 나에게 밟힐 것이고, 내가 죽어서 땅속에 묻힐 때에는 너는 당연히 나를 위해 비석이 되어 깎여 상할 것인데, 이것이 어찌 물(物)로 인하여 움직이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그 본성을 상하면서 도리어 나를 비웃는가?
나는 안으로는 실상(實相)을 온전히 하고 밖으로는 연경(緣境)을 끊었기에(予則內全實相而外空緣境, 나는 안으로는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을 온전히 하고 밖으로는 인연의 경계를 비웠고), 물(物)에게 부림을 받더라도 물(物)에 신경을 쓰지 않고, 사람에게 밀침을 받더라도 사람에게 불만을 갖지 않으며,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박절한 형편이 닥친 뒤에야 움직이고 부른 뒤에야 가며, 행할 만하면 행하고 그칠 만하면 그치니, 옳은 것도 옳지 않은 것도 없다.
자네는 빈 배를 보지 않았는가? 나는 그 빈 배와 같은데, 자네는 어찌 나를 책망하는가?” 하니, 돌은 부끄러워하며 대답이 없었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 '돌의 물음에 답하다(答石問)', 동국이상국후집(東國李相國後集) 제11권/ 문답(問答)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김동주 (역) ┃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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