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시와 문장은 뜻이 중심이다
대저 시(詩)는 뜻(意)으로 주(主)를 삼는 것이니, 뜻을 베푸는 것이 가장 어렵고, 말을 만드는 것이 그 다음 어렵다. 뜻은 또 기(氣, 정서情緖와 서정抒情의 바탕을 이루는 기운)로 주를 삼는 것이니, 기(氣)의 우열에 따라 천심(淺深, 얕음과 깊음)이 있게 된다.
그러나 기(氣)는 하늘에 근본한 것이니, 배워서 얻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氣)가 졸렬한 사람은 문장을 수식하는 데에 공을 들이게 되어, 일찍이 뜻으로 우선을 삼지 않는다. 대개 문장을 다듬고 문구를 수식하니 그 글은 참으로 화려할 것이다. 그러나 속에 함축된 심후한 뜻이 없으면, 처음에는 꽤 볼 만하지만, 재차 음미할 때에는 벌써 그 맛이 없어지고 만다.
그러나 시를 지을 때에 먼저 낸 운자(韻字)가 뜻을 해칠 것 같으면 운자를 고쳐내는 것이 좋다. 오직 다른 사람의 시를 화답할 경우에 그 운자가 험하거든 먼저 운자의 안치할 바를 생각한 다음에 뜻을 안배해야 한다. 이때에는 차라리 그 뜻을 다음으로 할지언정 운자는 안치하지 않을 수 없다.
글귀 중에 대를 맞추기가 어려운 것이 있으면 한참 동안 침음(沈吟, 속으로 깊이 생각함, 또는 나직히 읊조림)하고 나서 쉽게 얻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면 곧 그 글귀는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 글귀의 대를 맞추는 시간에 혹 전편(全篇)을 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니, 어찌 한 글귀 때문에 1편이 지체되게 해서야 되겠는가? 그때에 막 당하여 촉박하게 지으면 군색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시를 구상할 때에 깊이 생각해 들어가서 헤어나지 못하면 빠지게 되고, 빠지면 고착되고, 고착하면 미혹되고, 미혹하면 집착되어 통하지 못하게 된다. 오직 출입왕래하며 좌우전후로 두루 생각하여 변화가 자재하게 한 뒤에야 막힌 바가 없이 원만하게 된다.
혹은 뒷글귀로 앞글귀의 폐단을 구제하기도 하고 한 글자로 한 글귀의 완전함을 돕기도 하는 것이 있으니, 이것은 불가불 생각해야 할 것이다.
순전히 청고(淸苦, 사심없는 순수한 고뇌와 번민)로 시체(詩體)를 삼으면 산인(山人)의 격(格)이요, 순전히 화려한 말로 시편을 장식하면 궁액(宮掖, 왕의 거처 즉 궁궐)의 격이다. 오직 청경(淸警, 맑은 깨우침)ㆍ웅호(雄豪, 웅장하고 힘참)ㆍ연려(姸麗, 맑고 고움)ㆍ평담(平淡, 소박하고 산뜻함)을 섞어 쓴 다음에야 제대로 갖추어져서, 사람들은 일체(一體)로 이름하지 못한다.
시에는 9가지의 불의체(不宜體 마땅하지 않은 체)가 있으니, 이는 내가 깊이 생각해서 자득한 것이다.
1편 내에 옛사람의 이름을 많이 쓰는 것은 바로 재귀영거체(載鬼盈車體)요, 옛사람의 뜻을 절취하는 것으로 좋은 것을 절취하는 것도 오히려 불가한데, 좋지 못한 것을 절취한다면 이는 바로 졸도이금체(拙盜易擒體)다. 그리고 강운(强韻)을 근거없이 내어 쓰는 것은 바로 만노불승체(挽弩不勝體)요, 그의 재주를 요량하지 않고 운자를 정도에 지나치게 내는 것은 바로 음주과량체(飮酒過量體)요, 험한 글자를 쓰기 좋아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혹되기 쉽도록 하는 것은 바로 설갱도맹체(設坑導盲體)요, 말이 순조롭지 못한데 굳이 인용하는 것은 바로 강인종기체(强人從己體)요, 상스러운 말을 많이 쓰는 것은 촌부회담체(村父會談體)요, 기휘(忌諱, 꺼리고 싫어함, 거북하고 불편해서 꺼림)하는 말을 쓰기 좋아하는 것은 바로 능범존귀체(凌犯尊貴體)요, 거친 말을 산삭(刪削, 필요 없는 글자나 구절을 지워 버림)하지 않는 것은 바로 낭유만전체(莨莠滿田體)다. 이 불의체를 면한 뒤에야 더불어 시를 말할 수 있다.
시(詩)의 병통을 말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기쁜 일이다. 그러나 그의 말이 옳으면 받아들이고 옳지 않으면 나의 뜻대로 할 뿐이다. 어찌 듣기 싫어하기를 마치 임금이 간언을 거절하는 것과 같이 하여 끝내 그 허물을 모르고 넘길 필요가 있겠는가?
무릇 시(詩)가 이루어지면 반복 관찰하되, 자기가 지은 것으로 보지 말고 다른 사람이나 또는 평생 심히 미워하는 자의 시를 보듯 하여, 그 하자(瑕疵, 흠, 결점)를 열심히 찾아도 오히려 하자가 없는 뒤에야 그 시(詩)를 세상에 내놓는다.
무릇 논한 바는 시(詩)뿐만 아니라, 문(文, 문장)도 그러하다. 더구나 고시(古詩) 중에 아름다운 문구에 운자(韻字)를 단 매우 아름다운 것 같은 것임에랴? 뜻은 이미 우한(優閑, 막힘없이 넉넉하고 뛰어남)하고 말도 자유로워서 구속받는 점이 없다. 그렇다면 시(詩)와 문(文)은 역시 한 법칙일 것이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 '시(詩) 가운데 있는 은미한 뜻을 논한 약언(論詩中微旨略言)', 동국이상국전집 제22권/ 잡문(雜文) / 논(論)
"진실로 옛 정신을 지키고 본받으면서도(法古 법고) 적절히 변통하여 운용할 줄 알고 새롭게 창작(刱新창신)하면서도 능히 바른 것(能典)에 기초를 두고 있다면(苟能法古而知變。刱新而能典), 지금의 글이 곧 옛 글인 것이다." (연암 박지원, 초정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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