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흰구름을 사모하여
(상략) 어떤 이는 나를 초당선생(草堂先生)이라고 지목을 하지마는, 나는 두자미((杜子美), 두보)가 초당선생(草堂先生)이기 때문에 양보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욱이 나의 초당(草堂)은 잠깐 우거한 곳일 뿐이요, 살 곳으로 정한 데가 아니니, 우거한 곳을 가지고 호(號)로 삼자면, 그 호가 또한 많지 않겠는가.
평생에 오직 거문고와 시와 술을 심히 좋아하였으므로, 처음에는 나대로 호(號)를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거문고 타는 것도 정밀하지 못하고 시를 짓는 데도 공부가 미흡하고, 술도 많이 마시지 못하니, 이 호를 만약 그대로 가진다면, 세상에서 듣는 사람들이 크게 웃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것을 고쳐 백운거사(白雲居士)라고 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자네가 장차 청산에 들어가 누웠다가 백운(白雲)에 가서 누우려고 하는가. 왜 호(號)를 이렇게 지었는가.” 하기에, 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백운(白雲, 흰구름)은 내가 사모하는 것이다. 사모하여 이것을 배우면, 비록 그 실상을 그대로는 다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가까워지기는 할 것이다.
대개 구름이라는 것은 뭉게뭉게 피어 오르고 한가히 떠서, 산에도 머물지 않고, 하늘에도 매달리지 않으며, 표표(飄飄)히 동서로 떠다니면서 그 형적이 구애됨이 있겠는가. 잠깐 사이에 변화를 하고, 시종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으며, 뭉실뭉실 퍼져나가는 그 모양은 마치 군자가 세상에 나가는 것과 같은 기상이요, 염연(斂然)히 걷히는 그 모양은 마치 고인(高人)이 세상을 은퇴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비를 일으켜 가뭄을 소생시키는 것은 인(仁)이요, 와도 한 군데에 애착이 없고, 가도 서운한 미련이 없는 것은 통(通)이다. 그리고 빛깔이 푸르고, 누르고, 붉고, 검고 한 것은 구름의 정색이 아니요, 오직 희고 색채가 없는 것이 구름이 항상 가지는 빛깔이다.
덕이 이미 저와 같고, 빛깔이 또한 이와 같으니, 사모하여 이것을 배워서 세상에 나가게 되면, 물(物)을 윤택하게 할 것이요, 집에 들어앉게 되면 아무 욕심 없이 그 흰 것을 지켜서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무하유(無何有,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의 경지에 들어간 듯, 구름이 나인지 내가 구름인지 모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것이 고인(古人)의 포부에 가깝지 않겠는가.” 하고 말하였다.(이하생략)
-이규보(李奎報, 1168~1241), '백운거사 어록(白雲居士語錄)' 중에서, 『동문선 제107권 / 잡저(雜著)』-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이지형 (역) |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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