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참으로 안다(眞知)'는 것

사람의 보는 바(소견 所見, 식견 識見)는 세 층(層)이 있으니, 성현(聖賢)의 글을 읽어서 그 명목(名目, 표면에 내세우는 형식상의 구실이나 근거)을 아는 것이 한 층이요, 이미 성현의 글을 읽어서 그 명목을 알고도 깊이 생각하고 정밀하게 살펴 환하게 그 명목의 이치를 깨달음이 있어서, 분명하게 심목(心目, 무엇을 알아내거나 사물을 알아보는 마음과 눈)의 사이에서 그 성현의 말이 과연 나를 속이지 않음을 아는 것이 또 한 층입니다. (옮긴이 주: 번역된 글이 어렵다. 나름 정리하면, 첫째 단계는 성현의 글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표면적으로 아는 것 두번째 단계는 그 뜻을 살피고 깊이 생각하여 분명하게 이해하고 그 말씀의 이치를 깨달아, 그것이 진실되고 참된 것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아는 것 ) 


그러나 이 한 층 중에는 아주 여러 층이 있는데 그 일단(一端)만 깨달은 자도 있고, 그 전체를 깨달은 자도 있고, 전체 중에도 그 깨달은 것이 또한 얕고 깊은 것이 있습니다. 요컨대 입으로 읽고 눈으로 보는 그런 유(類)가 아니고 마음으로 깨달은 바가 있기 때문에 함께 한 층이 된 것입니다. 


이미 명목의 이치를 깨달아서 분명하게 심목의 사이에 있는데, 또 실천하고 역행(力行)하여서 그 아는 바를 채우고, 그 지극한 데에 미쳐서는 친히 그 경지를 밟고, 몸소 그 일을 하여서 한갓 눈으로 보는 것뿐만이 아닌 것이 있으니, 이같이 한 뒤에라야 비로소 '참으로 안다(眞知)'고 이를 수 있습니다. (옮긴이 주: 마지막 셋째 단계는 깨달아 아는 바를 몸소 실천하고 경험함으로써 체득하여 아는 것, 이것이 곧 '참으로 아는 것') 


최하의 한 층은 남의 말만 듣고 좇는 자요, 중(中)의 한 층은 바라보는 자요, 상(上)의 한 층은 그 경지를 밟아서 친히 본 자입니다.


비유하건대, 여기에 한 높은 산이 있어 산꼭대기의 경치가 말할 수 없이 절묘하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은 그 산이 있는 곳도 알지 못하고 다만 사람의 말만 듣고 믿기 때문에 남이 산꼭대기에 물이 있다고 하면 또한 물이 있는 줄로 여기고, 남이 산꼭대기에 돌이 있다 하면 또한 돌이 있는 줄로 여깁니다. 


이미 자기가 보지 못하고 오직 남의 말만을 좇으면 다른 사람이 혹 물이 없고 돌이 없다 하여도 또한 그 허실(虛實)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의 말은 한 가지가 아닌데 내가 보는 것이 일정함이 없으면 사람을 가리어 그 말을 좇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만약 믿을 만한 사람이라면 그 말도 또한 믿을 만합니다. 성현의 말은 반드시 믿을 만하기 때문에 여기에 따르고 어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미 그 말을 좇아도 그 뜻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이 혹 믿을 만한 사람의 말을 잘못 전함이 있어도 좇지 않을 수가 없는 것(따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학자들의 도(道)에 대한 보는 바가 또한 이와 같습니다. 한갓 성현의 말만 좇고 그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혹 그 본뜻을 잃은 자도 있고, 혹 기록이 잘못된 것을 보고도 오히려 끌어다가 억지로 합하여 좇는 자도 있으니, 이미 자기가 보지 못하면 그 형세가 그렇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지도(指導)로 인해서 그 산이 있는 곳을 알고 머리를 들어 바라보니 산꼭대기의 절묘한 경치가 환하게 눈에 가득 찼습니다. 이미 자기가 바라보았으니 다른 사람의 잘못 전하는 것이 어찌 그를 동요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그 절묘한 경치를 즐거워하여 반드시 몸소 그 지경을 밟고자 산꼭대기에 오르려고 하는 자도 있고, 또 이미 그 경치를 보기만 하고는 스스로 즐겁게 여기면서 다른 사람들이 전하는 말만 듣고 추종하는 것을 내려다보고, 자기도 모르게 손뼉을 치며 크게 웃고 이로써 만족하면서 산에 오르려고 하지 않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라보는 사람 중에도 또한 차이가 있습니다. 동쪽에서 그 동쪽 편만 본 자도 있고, 서쪽에서 그 서쪽 편만 본 자도 있고, 동서에 구애되지 않고 그 전체를 본 자도 있으니, 비록 부분과 전체의 차이는 있으나 이는 모두 스스로 본 것입니다. 


자기가 보지 못하고 남의 말만 좇는 자는 비록 전체를 말한다 하더라도 자기의 말이 아니니,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 일면(一面)이라도 바라본 자의 마음을 굴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또 어떤 사람은 이미 절묘한 경치를 바라보고 한없이 즐거워하여 옷을 걷고 활보하여 부지런히 산에 올라가는데, 짐은 무겁고 길은 먼 데다 역량(力量)은 한정이 있어 그 산꼭대기까지 다 올라가는 자가 드뭅니다. 이미 그 산꼭대기까지 다 오르면 절묘한 경치가 모두 내 물건이 되니 바라보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산꼭대기에 오르는 것 중에도 또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 동쪽 편만을 바라보고 동쪽 편으로 오른 자도 있고, 또 서쪽 편만을 바라보고 서쪽 편으로 오른 자도 있고, 그 전체를 바라보고 올라가 보지 않은 데가 없는 자도 있으니, 한쪽 편으로만 오른 자는 비록 산꼭대기까지 올랐다 하더라도 산에 오르는 지극한 공(功)은 되지 못합니다.


대개 이런 세 층이 있는데 그 중간의 곡절은 낱낱이 헤아릴 수 없으니, 먼저 그 산이 있는 곳을 알고서 비록 바라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산에 오르기를 마지 않아서, 하루아침에 산꼭대기에 이르면 발과 눈이 함께 이르러서 문득 내 물건이 되는 자가 있고, (증자(曾子)의 유(類)이다.) 또 그 산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하고서 우연히 산길을 가다가 비록 산에 오를 수는 있었으나 본래 산을 알지 못하고 또 산꼭대기를 바라보지도 못하였기 때문에 끝내 산꼭대기에 이르지 못한 자도 있습니다. (사마온공(司馬溫公)의 유(類)이다.) 


이와 같은 유(類)를 어떻게 다 들 수 있겠습니까. 이것으로 비유해 보면 지금의 학자들은 대개 남의 말을 좇는 자라서, 비록 말은 아무 탈이 없으나 남의 것을 모방하여 흉내 내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의 것을 모방하고 흉내 내는 중에는 말에 있어서 아무 탈이 없는 자를 또한 많이 볼 수 없으니, 더욱 한탄할 일입니다.


만약 공자 문하의 제자와 정자ㆍ주자 문하의 제자 중에 근본 기틀이 온전하지 못하고 깊지도 못한 자들이 있다면, 이는 모두 한쪽 편만을 바라본 자들입니다. 증점(曾點)은 전체를 바라보고 이것으로 즐거움을 삼아 산에 오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광(狂)에 그친 사람입니다. 


증점의 학문은 인욕(人欲)이 다한 곳에 천리(天理)가 유행해서 처소에 따라 충만하여, 흠결이 없음을 보았으니, 그 흉중(胷中)의 즐거움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제자(諸子,춘추전국시대에다양한 사상과 학설을 주장한 사람들)들이 한쪽 편만 보고 일하는 것의 말단에만 얽매여 조심하는 것을 내려다보고 어찌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지 않았겠습니까. 


비록 그러하나 그는 여기에만 즐거워하였을 뿐이요, 일찍이 머리를 숙이고 산에 오르는 공부가 없었으므로 자기 몸을 단속하는 행실은 도리어 제자(諸子)들의 근칙(몸가짐을 삼가고 스스로 조심함)하는 것만 못하였으니 본 물건이 어찌 자기 물건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안자(顔子)ㆍ증자(曾子)ㆍ자사(子思)ㆍ맹자(孟子)ㆍ주자(周子)ㆍ장자(張子)ㆍ정자(程子)ㆍ주자(朱子) 같은 이들은 바라보는 데만 그치지 않고 몸소 그 지경을 밟았습니다. 주자(朱子)가 60년이 되는 해에 비로소, “나는 금년에 바야흐로 의심이 없다.” 하였으니, 이는 몸소 보았다는 말이요, 맹자의 이른바 ‘자득(自得)’이라는 것도 또한 이 경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안자(顔子)와 명도(明道)는 공부함이 매우 쉬웠으니,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이 처한 곳이 산꼭대기와 본래 멀지 않기 때문에 눈을 뜨고 발을 옮기면 수고롭지 않고 이르는 것과 같습니다. 성인은 본래 산꼭대기에 있는 사람입니다. 


비록 본래 산꼭대기에 있다 하더라도 산꼭대기의 무궁하고 절묘한 경치는 두루 관람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비록 공자의 ‘태어나서 알고 편안히 행하는 것[生知安行]’으로서도 예악명물(禮樂名物)과 제기도수(制器度數)는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물은 뒤에 알았던 것입니다. 백이(伯夷)와 유하혜(柳下惠) 같은 무리는 비록 산꼭대기에는 올라갔다 하더라도 각각 한쪽 편에만 처하여 전체로써 자기의 물건으로 삼지 못하였습니다. 


이단(異端) 같은 것은 이른바 산꼭대기라는 것이 이 산이 아니요. 다시 다른 산의 산꼭대기가 있어, 놀랄 만한 물건이 있고 가시덤불이 길을 막고 있는데도 미혹된 자들이 이에 좇아가니, 또한 슬프지 않겠습니까. 


사람으로 이 산을 바라보지 못하고 한갓 남의 말만 믿는 자는 만약 남이 다른 산을 가리켜 이 산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평소에 믿고 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장차 옷을 걷고 가시덤불을 건너 좇아갈 것이니, 어찌 더욱 슬프지 않겠습니까. 만약 바라보는 자 같으면 어찌 이런 걱정이 있겠습니까. 


다만 한쪽 편만 바라보는 자는 본 것이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록 자기는 이단에 유혹되지 않았다고 하나, 발언(發言)하는 것이 혹 어긋나기도 하여 도리어 다른 사람을 그르치게 하니 가시덤불을 건너가는 자를 조장(助長, 도와서 자라나게함)하지 않으리라고는 기필할 수 없으니, 이런 곳에 더욱 눈을 밝게 뜨고 대담하게 하여 말을 극진하게 해서 명쾌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이하생략)


- 이이(李珥, 1536~1584), '성호원에게 답함(答成浩原)', 율곡선생전서 제10권/ 서(書)-


▲원글출처:ⓒ 한국고전번역원 | 권오돈 권태익 김용국 김익현 남만성 성낙훈 안병주 이동환 이식 이재호 이지형 하성재 (공역)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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