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소인(小人)의 간사함을 분별하는 것에 대하여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비부(鄙夫)와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비부는 용렬하고 악하며, 비루하고 졸렬한 사람을 칭한다.” 하였다. 


그 벼슬을 얻지 못하였을 때에는 얻으려고 근심하고, 얻고 나서는 잃을까 근심한다.


하씨(何氏)가 말하기를, “얻으려고 근심한다는 것은 얻지 못할까 근심한다는 것이다.” 하였다. ○ 신안 진씨(新安陳氏 진력(陳櫟))가 말하기를, “얻는다는 것은 부귀 권리를 얻는다는 말이다.” 하였다. 정말 잃을까 근심하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작게는 종기를 빨고 치질을 핥아 주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아비와 임금을 죽이는 것까지 다 잃을까 근심하는 데서 나온 말이다.” 하였다. ○ 호씨(胡氏)가 말하기를, “허창(許昌)의 근재지(靳裁之)란 사람이 말하기를, 선비의 품위(品位)에는 대개 세 가지가 있는데, 도덕에 뜻을 둔 이는 공명(功名)으로써 그 마음을 더럽힐 수 없고, 공명에 뜻을 둔 이는 부귀로써 그 마음을 더럽힐 수 없다. 부귀에만 뜻이 있을 뿐이라면 하지 않는 일이 없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부귀에만 뜻이 있다는 것이 곧 공자께서 말씀하신 비부이다.” 하였다.


말을 교묘[巧]하게 하거나 외모(外貌)를 잘 꾸미는 사람 중에 인인(仁人)이 드물다.


주자가 말하기를, “교(巧)는 잘한다는 것이요, 영(令)은 좋게 꾸미는 것이다. 말을 잘하거나 외모를 좋게 꾸며서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고 힘쓰게 되면, 사람의 욕심이 방자해져서 본심의 덕이 없어진다. 성인은 말을 박절하게 하지 않기 때문에 드물다라고 한 것이니, 전혀 없음을 알 수 있다.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깊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용모와 말씨는 바로 배우는 이가 힘써 길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을 교묘하게 하거나 외모를 잘 꾸며서[巧言令色] 사람의 보고 듣는 것을 즐겁게 하려 하면 마음이 밖으로 달려서 인(仁)한 이가 드물다. 만일에 이 용모와 말씨에서 잘 수양해서, 말을 할 때는 조급하지 않게 하고, 행동할 때는 반드시 온화하고 공손하게 하여, 다만 내심을 곧게 하고 외면을 방정하게 하는 실상에 꼭 맞도록 하게 되면 이것은 자신의 인격을 위하는 공부와 인(仁)을 구하는 요체가 될 것이니, 다시 무엇이 병될 것이 있겠는가. 


소인은 남의 결점을 들추어내는 것을 정직한 것으로 여기고, 겉으로는 엄한 체하나 안으로는 나약하니, 말을 교묘하게 하거나 외모를 좋게 꾸미는 자와는 다르나 그 감정을 숨기고 거짓을 꾸미는 마음을 살펴보면 실상은 교언영색하는 자보다 더한 사람이니, 성인이 이들을 미워한다.” 하였다.


자색(紫色)이 주색(朱色)을 빼앗는 것을 미워하며, 정성(鄭聲)이 아악(雅樂)을 문란하게 하는 것을 미워하며, 말을 교묘하게 하는 입[利口]이 나라를 전복[覆]시키는 것을 미워한다.


주자가 말하기를, “주색(朱色)은 정색(正色)이요, 자색은 간색(間色, 혼합색, 중간색)이다. 아(雅)는 바른 것이요, 이구(利口)는 말이 빠르고 넉넉한 것이요, 복(覆)은 기울어져 무너지는 것이다.” 하였다. 


○ 범씨(范氏)가 말하기를, “천하의 일은 대개는 바르게 하여 이기는 사람이 적고, 바르지 못하게 하여 이기는 사람이 많다. 성인이 이 때문에 이들을 미워하는 것이다. 말 잘하는 사람은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고, 그른 것을 옳다고 하며, 어진 이를 불초하다고 하고, 불초한 이를 어질다고 하는데, 임금이 진실로 그 말을 믿으면 국가의 전복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향원(鄕原)은 덕의 적(賊)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원(原) 자는 원(愿) 자와 그 뜻이 같으니,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사람을 말한다. 공자는, ‘그것이 덕인 듯하나 덕이 아니다. 그러므로 덕의 적(賊)이다.’ 하였다. 


○ 만장(萬章)이 “한 고을 사람들이 모두 원인(原人 근엄하고 후덕한 사람)이라고 일컫는다면 어디를 가더라도 원인이 아닐 수 없는데, 공자가 덕의 적(賊)이라고 하신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니,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를 비난하려 해도 이렇다 할 비난거리가 없고, 그를 공격하려 들더라도 이렇다 할 공격거리가 없다. 세속과 동조하고 더러운 세상과 합류하여, 들어앉아 있을 때는 충직하고 선의가 있는 듯하며, 나아가 행동할 때는 청렴하고 결백한 듯해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좋아하고 스스로도 옳다고 여기지만 그러한 사람과는 요순의 도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덕의 적이라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탐오(貪汚, 욕심이 많고 하는 짓이 추잡하고 더러움)하고 아첨하는 것은 소인의 한결같은 태도로 어리석고 어두운 임금이 아니라면 이것을 분변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직 옳은 듯하나 그른 자에 대해서는 비록 밝은 왕이라도 분변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군자는 낯빛을 바르게 하여 곧은 말을 하는데, 소인 중에 외형은 엄격하게 하고 들추어내는 것을 정직한 것으로 여기는 자가 그와 비슷합니다. 


또 군자는 행실이 완전하여 결점이 없는데, 소인 중에 삼가고 조심하여 비난하려 해도 비난할 거리가 없는 자가 그와 비슷합니다. 성현이 깊이 경계하심이 당연합니다. 대개 향원은 마음을 감추고 세상에 잘 보여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며, 세속과 부화뇌동하여 고식적이고 비루한 데 처하는 것을 편안히 여기고, 도를 행하는 선비를 억압하고 학문하는 길을 끊어 버리니, 그 해되는 것이 이단(異端)이 세상을 현혹시키는 것보다 더욱 심합니다. 후세의 선비가 만일 향원이라 지목하면 누군들 부끄러워하고 또 노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행위를 살펴보면, 이리저리 재고 몸을 사리면서 녹이나 받아먹다가 옛것을 회복하자는 설을 듣든가 도에 뜻을 둔 선비를 보든가 하면 문득 우활(迂闊, 사리에 어둡고 세상물정을 모름)하여 이루기 어렵다고 비웃고, 다만 구습(舊習)을 지키고 미봉(彌縫, 일의 빈 구석이나 잘못된 것을 임시변통으로 이리저리 주선하여 꾸며 댐)하는 것을 일삼으니, 이들 모두가 향원을 본받는 사람들입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상도(常道, 변하지 않는 떳떳한 도리,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를 돌이킬 뿐이다. 상도가 바르면 서민이 흥기(興起 세력이 왕성해짐, 의로운 기운이 왕성해짐)한다.” 하였습니다. 상도를 돌이키는 책무를 전하께 깊이 바랍니다. 이상은 소인의 간사함을 분별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 이이(李珥, 1536~1584), 율곡선생전서 제24권/ 성학집요(聖學輯要) 6/ 제4 위정(爲政) 중에서 부분-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권오돈 권태익 김용국 김익현 남만성 성낙훈 안병주 이동환 이식 이재호 이지형 하성재 (공역)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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