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구방심(求放心):놓쳐버린 마음을 거두어 들이는 것
○ 오만함은 자라나게 해서는 안 되고 욕심은 내키는 대로 두어서는 안 되며, 뜻은 가득 채워서는 안 되고 즐거움은 끝까지 채워서는 안 된다. 《예기》
응씨(應氏)가 말하기를, “공경의 반대가 오만이요, 정(情)이 움직이는 것은 욕심이다. 뜻이 다 차면 넘치고 즐거움이 지극하면 도리어 슬픔이 온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뜻이 가득 찬다[志滿]’는 것은 적게 얻은 것에 만족하여 우쭐대며 스스로를 대단하다 여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닭이나 개가 달아나면 구(求)할 줄을 알면서도 마음을 놓쳐 버리고서는 구할 줄 모른다. 학문의 도란 다른 것이 아니다. 그 놓쳐 버린 마음을 구하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맹자》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마음은 지극히 중요한 것이고 개와 닭은 지극히 하찮은 것인데, 개와 닭을 풀어 놓은 것은 구할 줄 알면서 마음을 놓쳐 버리고는 구할 줄을 모르니, 어찌 지극히 하찮은 것은 아끼면서 지극히 중요한 것은 잊어버리는가. 이것은 생각을 하지 않아서 그럴 뿐이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학문하는 길은 진실로 한 가지만은 아니지만 그 도는 놓쳐 버린 마음을 구하는 데 있을 뿐이다. 능히 이같이 한다면 지기(志氣)가 환하게 밝아지고 의리가 환하게 드러나서 높은 경지에까지 이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아니하면 어두워지고 방탕해져서 배움에 종사한다 하더라도 마침내 밝게 트이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자가 말하기를, ‘성현의 수많은 말들이 다만 사람이 놓쳐 버린 마음을 거두어들여 몸으로 되돌아 들어오게 해서, 스스로 향상해 가서 아래로부터 배워 위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맹자가 처음으로 이르신 절실한 말인데, 정자가 또 발명하여 그 뜻을 자세히 한 것이니, 배우는 이는 마땅히 마음에 간직하고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맹자는 ‘학문의 도는 단연코 놓쳐 버린 마음을 구하는 데 있다’고 하였으니, 배우는 이는 모름지기 먼저 그 놓쳐 버린 마음을 수습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마음이 풀어져 버려 널리 배우는 일에도 등한해지고 자세히 따져 묻는 일에도 등한해질 것이니, 어떻게 밝게 분변하고 독실히 행할 수 있겠는가? 대개 몸은 집과 같고, 마음은 집주인과 같으니, 집주인이 있어야 문 앞에 물을 뿌리고 쓸며 집안일을 정돈할 수 있다. 만약 주인이 없다면 이 집은 그저 황폐된 집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이른바 마음을 놓쳐 버린다는 것은 마음이 딴 곳으로 도망쳐 가는 것이 아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문득 사라졌다가 막 정신을 차리고 보면 또 이내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수습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끌어당기면 바로 보이는 것이다. 만일 마음을 수습하여 의리 위에 안정되게 두고, 이것저것 요란한 생각을 하지 않고서 오래가다 보면 저절로 물욕은 적어지고 의리는 두터워질 것이다.” 하였다. 이상은 마음을 수렴함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 함양(涵養, 능력이나 품성따위를 기르고 닦음)은 모름지기 공경스러운 태도로 해야 한다. 학문으로 나아가는 것은 앎을 끝까지 다하는 데 있다. 《정씨유서(程氏遺書)》 ○ 이천(伊川) 선생의 말씀이다. 정자가 말하기를, “근본을 먼저 북돋운 뒤에 방향을 세울 수 있으니, 방향이 바로 서고 나면, 목적한 바를 이루는 수준은 힘써 행하느냐 힘써 행하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였다. 섭씨(葉氏)가 말하기를, “마음의 덕을 길러서, 근본을 깊고 두텁게 한 뒤라야 방향을 세워도 어긋나지 않으며, 또 쉬지 않고 힘써야 깊은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배우는 이는 모름지기 공경스레 이 마음을 지키되, 급박하게 해서는 안 되고, 마땅히 깊고 두텁게 배양하여 그 속에 깊이 잠긴 뒤라야 스스로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절박하게 구하면 단지 자신을 삿되게 할 뿐이어서, 결국 도에 이르지 못한다.” 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함양(涵養)이라는 절목을 옛날 사람은 바로 《소학》에서부터 함양하여 성취하였다. 그러므로 《대학》의 도는 다만 격물(格物)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런데 지금 사람은 전날의 이런 공부에는 따르지 않고 《대학》의 격물 공부만 우선으로 쳐서 다만 생각이나 지식만으로 구하려 하고, 다시 마음을 잡아 두는[操存] 데는 힘쓰지 않는다. 그러니 비록 헤아려서 십분 터득했다 하더라도 실지로는 의거할 데가 없을 것이다. 대개 경(敬) 자는 위로도 통하고 아래로도 통하는데, 격물치지(格物致知)는 그 사이의 절차로서 나아가는 곳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지금 사람은 모두 근본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아 경(敬) 자를 가져다 말만 할 뿐, 실행해 나가지를 않는다. 근본이 서 있지 않기 때문에 기타 사소한 공부가 귀결할 곳이 없게 된다. 명도(明道)와 연평(延平) 모두 사람들에게 정좌(靜坐)를 가르치셨으니, 보아 하건대 모름지기 정좌를 해야 한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마음이라는 것은 지극히 텅 비어 있고 신령하면서도 헤아릴 수 없이 신령스러워, 항상 한 몸의 주재가 되어, 만 가지 일의 벼리[綱]가 되니 잠시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내달려 날아가 버려 외물을 향해 물욕을 따른다면, 몸의 주재가 없어지고 만 가지 일에 벼리가 없어져서, 비록 굽어 쳐다보고 돌아보는 사이에도 자기가 어디 있는 줄도 스스로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더구나 성인의 말씀을 반복하고 사물을 참고하여 의리의 마땅한 귀결을 구하는 일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진실로 능히 공경하고 조심해서 항상 이 마음을 보존하며, 종일토록 엄숙한 태도로 물욕에 빠지는 바가 되지 아니한다면, 곧 이것으로 독서도 하고 이것으로 이치도 관찰하여, 어딜 가든 통하지 않는 곳이 없을 것이고, 이것으로 사물에 응접하면 어떤 일이건 마땅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공경함에 거하고 뜻을 간직하는 것이 글을 읽는 데에 근본이 되는 까닭이다.” 하였다. ○ 설씨(薛氏)가 말하기를, “고요한 가운데 무한한 묘리(妙理)가 모두 나타난다.” 하였다.
○ 신이 생각건대, 남당(南塘) 진백(陳栢)이 지은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은 배우는 자들이 받아들이기에 매우 절실합니다. 그러므로 삼가 아래에 기록합니다. 수렴하는 데 가장 힘이 될 것입니다.
잠(箴)에 이르기를, “닭이 울면 잠에서 깨어 생각이 점점 흩어진다. 그사이에 어찌하여 담담하게 정돈하고서 옛 허물을 반성하거나 새로 터득한 것을 실마리로 삼아 차근차근 조리(條理)를 잡고 분명하게 마음속으로 이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상은 일찍 잠에서 깨어났을 때를 말한 것입니다. 근본이 섰거든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고 의관을 갖추고서, 단정히 앉아서 몸가짐을 가다듬고, 솟아나는 해처럼 밝게 마음을 추스려 엄숙하게 정제(整齊)하여 밝게 비우고 고요히 하나로 모으라. 이상은 새벽에 일어났을 때를 말한 것입니다.
이에 책을 펴서 성현을 대한다면, 공자가 앉아 있고 안(顔)ㆍ증(曾)이 앞뒤에 있을 것이니, 성사(聖師)께서 말씀하신 자세한 내용을 경청하고 제자들이 묻고 변론한 것을 반복해서 참작하여 바르게 판단하라. 이상은 독서를 말한 것입니다. 일이 생기면 바로 응하여 밝은 명령[明命]이 빛나서 항상 눈앞에 있는 것을 증험할 것이며, 일에 다 응하고 나면 예전대로 마음이 담담해져 정신을 모으고 생각을 쉬게 할 것이다. 이상은 일에 응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동정(動靜)의 순환을 마음으로 살피어 고요할 때 보존하고 움직일 때 살펴서 두 갈래 세 갈래로 갈라지지 않게 하라. 글을 읽은 여가에는 여유를 갖고 정신을 이완하고 성정(性情)을 기르라. 이상은 온종일 부지런함[日乾]을 말한 것입니다.
날이 저물면 사람이 게을러져서 혼미해지기 쉬우니, 단정히 재계하고서 정신을 밝게 떨쳐 일으키라. 밤이 이슥하면 잠자리에 들되, 손발을 가지런히 모으고서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심신(心神)이 잠들 수 있게 한다. 이상은 저녁에 조심함[夕惕]을 말한 것입니다.
밤의 원기(元氣)를 기르면 정(貞)하면 근본[元]으로 돌아갈 것이니 생각을 여기에 두어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쓰라.” 하였습니다. 이상은 숙야(夙夜)를 겸해서 말한 것입니다.
신이 생각건대 놓쳐 버린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학문의 기초입니다. 대개 옛사람은 제 스스로 밥 먹고 말할 수 있을 때부터 바로 가르쳐서 행동마다 잘못이 없게 하고, 생각마다 지나친 것이 없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양심을 기르고 그 덕성(德性)을 높였던 것입니다. 어느 때 어느 일이라도 그렇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공부가 여기에 의거하여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이런 공부는 하지 않고 바로 이치를 궁구하고 몸을 닦는 공부에 종사하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혼란스러워지고 행동이 규범에 어긋나서, 그 공부가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해 결코 성공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정(先正)께서 사람들에게 정좌(靜坐)하는 것을 가르치시고, 또 구용(九容)으로 몸가짐을 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배우는 자가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좌라는 것 역시 일이 없을 때를 가리킨 것이니, 만일 사물에 응접할 때라면 정좌하는 것에 집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임금의 한 몸에는 온갖 긴요한 일들이 몰려드니, 만일 일 없을 때를 기다려 정좌한 뒤에야 학문하는 게 된다고 한다면 아마 그렇게 될 때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움직일 때와 고요할 때를 막론하고 이런 마음을 잊지 않고 마음 지키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노재(魯齋) 허형(許衡)이 말한 바와 같이 천만인 가운데 있더라도 항상 자기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일이 없을 때에는 텅 빈 고요함으로 자기의 본체[體]를 기를 수 있고, 일이 있을 때에는 밝게 살펴서 마음의 쓰임을 바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상의 학문의 근본이 여기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현의 가르침은 환하여 속이지 아니하는 것이오니, 이 점을 유념하시기를 바라옵나이다.
- 이이(李珥, 1536~1584), 율곡선생전서 제20권/ 성학집요(聖學輯要) 2/ 제2 수기(修己) 중에서 부분-
▲원글출처:ⓒ 한국고전번역원 ┃ 권오돈 권태익 김용국 김익현 남만성 성낙훈 안병주 이동환 이식 이재호 이지형 하성재 (공역) ┃ 1968
*옮긴이 주: 성학집요 (聖學輯要)는 조선 선조(宣祖) 때, 율곡 이이(李珥)가 제왕의 학문을 돕기 위하여 지은 책이다. 그 내용은 《대학(大學)》의 본뜻에 의거하여 성현(聖賢)들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고증, 해설한 것으로 13권 7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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