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강독] 군자와 소인을 분변하는 방법
사람을 판단하는 방법에 대하여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오직[惟] 어진 사람이라야 능히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을 미워할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논어》 아래도 이와 같다. 주자가 말하기를, “오직이란 말은 유독(惟獨)이라는 뜻이다. 대개 사람은 사심이 없어야만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이치에 합당하니, 정자(程子)가 말한, ‘그 공정한 것을 얻는다.’는 것이 이것이다.” 하였다.
○ 유씨(游氏)가 말하기를,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것은 천하 사람들의 같은 정상(情狀)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늘 그 바른 것을 잃는 것은 마음이 사정에 얽매여 스스로를 극복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오직 어진 사람은 사심이 없기 때문에 제대로 좋아하고 미워할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그 사람의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지 못한다."
경원 보씨(慶源輔氏 보광(輔廣))가 말하기를, “말은 마음의 소리다. 말의 득실(得失)로 인하여 그 사람의 사(邪)와 정(正)을 알 수 있으니, 오직 격물(格物)하고 궁리하는 군자라야 이것을 능히 한다.” 하였다. 이 두 절은 몸을 닦아 마음이 공정하고 이치가 밝아진 뒤에야 사람을 잘 알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 하는[以] 것을 보고[視],
주자가 말하기를, “이(以)는 한다는 말이다. 착한 일을 하는 이는 군자가 되고 악한 일을 하는 이는 소인이 된다.” 하였다.
그 하는 연유(綠由)를 살펴보고[觀],
주자가 말하기를, “관(觀)은 본다[視]는 것보다 상세하게 보는 것이요, 유(由)는 소종래(所從來, 거쳐서 나온 지난 내력. 출발점)란 뜻이다. 일은 비록 착하나 뜻의 소종래가 착하지 못하면 역시 군자가 되지 못한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소행이 비록 착할지라도 만약 명예를 좋아하고 벼슬을 좋아하는 생각이 마음에 있다면 그 하는 일의 소종래가 착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편안하게[安] 여기는 것을 관찰하면,
주자가 말하기를, “찰(察) 자는 관(觀) 자보다 더욱 상세하게 본다는 뜻이요, 안(安)은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 하는 일의 소종래가 비록 착하다 하더라도 마음에 즐거워하는 것이 여기에 있지 않으면 역시 거짓일 것이니, 어찌 오래도록 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소위(所爲)는 보기 쉽지마는 소유(所由)와 소락(所樂) 같은 것은 이치를 궁구하고 말을 아는 이가 아니면 분명히 알 수 없다.
"사람이 어찌[焉] 숨길[廋] 수 있겠는가. 사람이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
주자가 말하기를, “언(焉)이란 ‘어찌’라는 뜻이요, 수(廋)는 숨긴다는 뜻이다. 거듭 되풀이하여 깊이 밝힌 것이다.” 하였다. ○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내 자신이 말을 알고 이치를 궁리하면 이 소위(所爲)와 소유(所由)와 소안(所安)으로써 사람을 살피기를 성인(聖人)과 같이 할 수 있다.” 하였다.
남이 자기를 속일[詐] 것이라고 미리 방비하지[逆] 말고, 남이 자기를 불신(不信)할 것이라고 미리 억측[億]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속이고 불신하는 일에 대하여 먼저 알아채는 자라야 현명한 사람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역(逆)은 이르지 않았는데 맞이하는 것이요 억(億)은 보이지 않는데 짐작하는 것이며, 사(詐)는 남이 자기를 속이는 것을 말하고, 불신(不信)은 남이 자기를 의심하는 것을 말한다. 억(抑)은 반어사(反語辭)이다. 비록 자기를 속이리라든가 불신하리라는 데 대하여 미리 방비하고, 억측하지 않을지라도 남의 실정과 허위에 대하여 자연히 선각(先覺)을 하여야만 현명한 이가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 양씨(楊氏)가 말하기를, “군자는 성(誠)을 한결같이 해야 한다. 그러나 성(誠)하면서 밝지 못한 이가 없기 때문에 비록 남이 자기를 속일 것이라고 미리 방비하지 아니하고 남이 자기를 불신할 것이라고 미리 억측하지 않더라도 항상 먼저 깨닫는다. 만약 미리 방비하거나 억측하지 않다가 마침내 소인에게 속게 되면 이 또한 보잘것없어지고 말뿐이다.” 하였다.
○ 신안 진씨(新安陳氏 진력(陳櫟))가 말하기를, “미리 방비하고 미리 억측한다는 것은 사견이 분요(紛擾)한 것이요, 먼저 깨닫는다는 것은 진견(眞見)이 철저히 밝은 것이다. 진실로 일에 앞서 소인의 간사한 것을 예측할 것은 아니지마는, 역시 일을 당하여 소인의 간사한 술수에 빠지지 않아야 성명(誠明)한 군자가 된다.” 하였다.
"뭇사람이 미워해도 반드시 살펴야 하며, 뭇사람이 좋아해도 반드시 살펴야 한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주위에서 모두 어질다고 해도 아직 수용해선 안 되며, 모든 대부들이 다 어질다고 해도 아직 수용해선 안 된다. 나라 사람들이 다 어질다고 한 뒤에 살펴서 그 어진 것을 본 뒤에 기용해야 한다. 주위에서 다 옳지 못하다 해도 듣지 말고, 모든 대부들이 다 옳지 못하다 해도 듣지 말 것이며, 나라 사람들이 다 옳지 못하다고 한 뒤에야 이것을 살펴서 그 옳지 못한 것을 본 뒤에 버릴 것이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사람은 시속(時俗)과 함께 하여서 대중에게 기쁨을 사는 자가 있고, 또 우뚝 서다 보니 세속의 미움을 받는 자도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스스로 깊이 살펴서 그 어질고 어질지 못한 실상을 발견한 연후에 기용하든지 제거하든지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어진 이에 대해서 아는 것이 깊어지고 그에게 맡기는 책임이 무거워 재주 없는 자가 요행히 진용(進用)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이상은 사람을 관찰하는 기술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군자(君子)의 행실에 대하여
○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하지 않는 일이 있은 뒤에 무언가를 할 수 있다.” 하였다. 《맹자(孟子)》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은 선택할 줄 안다는 것이다. 하지 않는 일이 있기 때문에, 무언가를 할 수 있다. 하지 않는 일이 없는 자가 어찌 무언가를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불인(不仁)을 하지 않는 자라야 인(仁)을 할 수 있고, 불의(不義)를 하지 않는 자라야 인(仁)을 할 수 있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대개 선비가 도에 깊이 들어가기는 어려우나, 다만 그 마음에 있는 것이 달라서 선악을 분별하고 염치를 안다면, 이러한 사람은 대부분 점점 좋아질 것이다.” 하였다.
《주역》에 이르기를, “군자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하였다. 《주역(周易)》 〈규괘(睽卦) 상사(象辭)〉
정자가 말하기를, “성현의 처세는 일상적인 인간의 도리에 있어서는 세속에서 다 같은 바와 크게 다를 것은 없고 때때로 홀로 다른 점은 있다. 크게 같이 하지 못하는 자는 윤상(倫常)을 문란하게 하고 이치를 어기는 자이며, 홀로 다르게 하지 못하는 세속을 따라 그른 것을 익히는 자이다. 요컨대 같으면서도 다를 수 있어야 한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군자는 이륜(彛倫)의 행위에 있어서는 세속과 대부분 같지마는, 그 가운데 다른 것이 있습니다.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은 같지마는 부모를 도리로서 깨닫게 하고,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효도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속인과 다르고, 임금을 존경하는 것은 같지마는 임금을 도리에 맞도록 인도하다가 합하지 않으면 떠나가는 것이 속인과 다르며, 처를 사랑하는 것은 같지마는 서로 손님같이 존경하여 정욕에 빠지지 않는 것이 속인과 다르고, 형에게 순종하는 것은 같지마는 화락한 마음으로 서로 힘써서 학행을 연마하는 것이 속인과 다르며, 친구끼리 사귀어 노는 것은 같지마는 오래도록 존경하고 서로 보살펴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속인과 다릅니다.
제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고, 제 임금을 존경하지 않고, 부부끼리 눈 흘기고, 형제끼리 불화하며, 친구끼리 서로 해치는 것은, 본래 상도를 어지럽히고 풍속을 망치는 사람이니 말할 것도 못 됩니다마는, 세속에 행실이 있다는 사람들도 군자의 도를 모르기 때문에, 다만 몸만을 봉양하다가 부모를 죄과에 빠뜨리면서도, 도리어 군자가 어버이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것을 불효가 아닌가 생각하고, 임금에게 뜻을 얻지 못하면 이에 마음이 초조[熱中]하여 나가기만 하고 그칠 줄을 모르면서 도리어 군자가 세상에 나가기를 어렵게 여기고, 물러서기를 쉽게 하는 것을 불경이 아닌가 생각하며, 정욕(情欲)으로 예를 무너뜨려 지나치게 애정에 빠져 도리어 군자가 낮에는 내실에 있지 않는 것을 매정한 게 아닌가 생각하고, 형제끼리 서로 모여 놀고 술과 음식을 즐기면서 도리어 군자가 갈고 닦으며 학문에 힘쓰는 것을 우애를 상하게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며, 친구끼리 화합하여 어깨를 치고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서로 희롱하면서 도리어 군자가 위의(威儀)를 지키는 것을 우정이 친밀치 못한 게 아닌가 생각하니, 고질적인 속견(俗見)이 오래되었습니다.
만일 윗자리에 있는 이로서 먼저 도리를 알아서 밝게 보는 이가 아니라면, 세속과 다른 것을 그르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가 드물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군자가 속인과 다른 까닭은 풍속이 옛 도(道)를 회복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덕화가 행해져 풍속이 아름다워지고 이 도(道)가 밝아져서 크게 행해지면 속인들이 모두 군자일 것이니, 바로 홀로 다르게 하려고 한들 그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훌륭한 신하는 도로써 임금을 섬기다가 옳지 못하면 그만둔다.” 하였다. 《논어》
주자가 말하기를, “옳지 못하면 그만둔다는 것은 마음이 합하지 않으면 그만두고 가는 것을 말한다. 도로써 임금을 섬기는 이는 임금의 욕심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요, 옳지 못하면 그만둔다는 것은 반드시 자기의 뜻을 행한다는 것이다.” 하였다. 이상은 주자의 본주(本註)이다.
○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임금을 섬기되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물러나서는 임금의 허물을 고쳐 주기를 생각한다. 그래서 그 임금의 아름다운 것은 순하게 따르고 그 악한 것은 바로잡아 구원을 하기 때문에 위와 아래가 서로 친하게 되는 것이다.” 하였다. 진씨(眞氏)가 말하기를, “나아간다는 말은 들어가서 그 임금을 보는 것을 말한 것이요, 물러간다는 것은 나와서 자기 집[私室]으로 감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려운 것을 임금에게 하라고 책임지우는 것을 공(恭)이라고 하고, 선을 베풀고 간사한 것을 막는 것을 경(敬)이라고 하며, 우리 임금이 무능하다고 하는 것을 적(賊)이라고 한다.” 하였고, “나는 요순의 도가 아니면 감히 임금 앞에 의견을 올리지 않는데, 제(齊)나라 사람들은 나만큼 임금을 공경하는 이가 없다.” 하였다. 범씨(范氏)가 말하기를, “신하가 어려운 일로써 임금에게 책임 지워서 그 임금으로 하여금 요순 같은 임금이 되게 하는 것은 크게 임금을 높이는 것이며, 착한 도를 베풀고 임금의 사심을 막아서 임금이 혹시나 허물 있는 지경에 빠질까 하고 염려하는 것은 임금을 공경하는 것이 지극한 것이며, 그 임금이 도를 행할 능력이 없다고 하면서 서로 고하지 않는 것은 그 임금을 해롭게 하는 바가 심한 것이다.” 하였다. ○ 이상 두 조목은 도로써 임금을 섬기는 것을 말한 것이다.
○ 또, “벼슬을 하는 자로서 그 직분대로 할 수 없으면 가고, 간관(諫官)들은 그 간하는 말을 듣지 않을 때는 간다.” 하였다.
○ 송(宋)나라 신종(神宗)이 사마광(司馬光)을 등용하고자 불러서 허주 영(許州令)을 맡기고는, 대궐을 지나가는 길에 임금을 만나도록 하였다. 조서(詔書)를 내릴 적에 정호(程顥)에게, “내가 사마광을 부르는데 경의 생각에는 사마광이 올 것 같은가?” 하니, 정호가 대답하기를, “폐하가 그의 말을 능히 받아들이면 그가 반드시 올 것이요,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가 반드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신종이 말하기를, “말이야 받아들이든지 안 받아들이든지 사마광 같은 이가 항상 좌우에 있게 되면 임금에게 저절로 허물이 없어지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사마광이 과연 소명을 사양하였다. 신종이 사마광이 어진 것을 알면서 그의 말은 받아들이지 않고 다만 소명으로 부르려고만 하였으니, 어진 이를 좋아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 이상의 두 조목은 옳지 못하면 그만둔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임금을 섬기되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물러가는 것은 쉽게 여기면 관위(官位)에 질서가 있고, 어진 사람이 쓰이고, 어질지 못한 사람이 부림을 당하면 지위에 질서가 있다. 나아가기를 쉽게 여기고 물러가기를 어렵게 여기면 관위가 문란하다. 문란하다는 것은 어진 것과 어질지 못한 것이 전도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가 세 번 읍하여 사양하다가 나아가고 한 번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은 난을 멀리하는 것이다.” 하였다. 여씨(呂氏)가 말하기를, “세 번 읍(揖)하는 것은 세 번 사양한다는 것이다. 만약 주인의 공경함이 지극하지 않은데 구태여 나아가거나, 주인의 마음이 태만한데 사양하지 않으면 빈주(賓主)의 분수가 문란하다. 벼슬할 만하면 하고, 그만둘 만하면 그만두며, 만날 만하면 만나고, 사양할 만하면 사양하여, 진퇴의 의리가 한결같아야 한다.” 하였다.
○ 여씨(呂氏)가 말하기를, “임금이 나를 믿어서 스승으로 삼을 만하더라도 내게 배운 뒤에 나를 신하로 삼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나아가지 아니하며, 나를 믿어서 국정을 잡을 만하더라도 계손씨와 맹손씨처럼 대우하면 역시 나아가지 아니하며, 번육(膰肉 제사 지낸 고기)이 이르지 아니하면 곧 가 버리며, 영공(靈公)처럼 진(陳) 치는 것을 물으면 곧 가 버린다. 군자의 도는 임금을 바르게 할 따름이니, 자기를 굽히는 자로서 남을 바르게 하는 이는 없다.” 하였다. 이상의 두 조목은 진퇴하는 도리를 통틀어서 논한 것이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선비는 곤궁해도 의(義)를 잃지 않고, 출세해도 도를 떠나지 않는다. 곤궁해도 의를 잃지 않기 때문에 선비는 자신을 잃지 않고[得己], 영달해도 도를 떠나지 않기 때문에 백성이 실망하지 않는다.” 하였다. 《맹자》
주자가 말하기를, “득기(得己)라는 것은 스스로를 잃지 않는다는 것이요, 그 자신을 잃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백성이 실망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본래 그 도를 일으키고 다스림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는데, 지금 과연 소망대로 되었다는 뜻이다.” 하였다. ○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옛사람은 뜻을 얻으면 은택을 백성에게 가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몸을 닦아 세상에 그 이름을 나타내며, 궁할 적엔 홀로 그 몸을 착하게 하고, 영달하면 천하를 다 같이 착하게 한다.” 하였다.
《주역》에 이르기를,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그 일을 높이 숭상한다.” 하였다. 《주역(周易)》 〈고괘(蠱卦) 상구(上九)〉
정자가 말하기를, “선비가 스스로 높이 숭상하는 길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길이 있다. 도덕을 품었으나 때를 만나지 못해 고결하게 스스로를 지키는 이도 있고, 이윤(伊尹)과 태공(太公)이 세상에 나오기 전 같은 때이다. 또 지족(止足)의 도를 알아서 물러가 스스로 몸을 보존하는 이도 있으며, 장량(張良)과 소광(疏廣) 같은 유이다. 또 자기 재능과 분수를 헤아려서 편안한 마음으로 남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 이도 있고, 서치(徐穉)와 신도반(申屠蟠)의 유이다. 또 청렴하게 스스로 절개를 지켜서 천하의 일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홀로 그 몸을 깨끗이 하는 이도 있으니, 접여(接輿)와 하궤(荷簣)의 무리이다. 이들은 처사에 비록 득실(得失)과 대소(大小)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다 스스로 자기의 일을 높이 숭상하는 사람들이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선비가 벼슬하지 않는 것은 본래 그 단서가 한 가지가 아니니, 대개는 정자(程子)가 논한 네 가지에 불과합니다. 이른바 득(得)이란 것은 위의 세 가지이고, 실(失)이란 것은 아래의 한 가지이며, 대(大)란 것은 위의 한 가지이고, 소(小)란 것은 아래의 세 가지입니다. 대개 임금이 경(敬)을 극진히 하고 예(禮)를 다하지 않으면 도덕을 갖춘 선비를 만날 수 없으며, 간(諫)하는 것을 실행하거나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신하로 삼을 수 없는 것이니, 임금은 마땅히 정성껏 위임하고 시종 의심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칠 줄을 알고 분수를 헤아릴 줄 아는 선비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만일 위란의 기미를 알고 먼저 물러가면 임금은 마땅히 느끼고 깨달아 허물을 고쳐 화근을 끊어 없애며, 정성을 다하여 수용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화의 기미를 본 것은 아니나 편안하기를 구하여 물러가면 임금은 마땅히 그 뜻을 빼앗지 말고 그 절조를 가상히 여겨 염치를 장려하는 자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혼자 제 몸만 결백하게 하는 사람은 비록 중(中)에 지나치고 정(正)을 잃었다고 하더라도 이욕(利欲)을 벗어난 사람으로, 성명(性命)의 정(情)을 잃어버리고 부귀를 탐내는 사람에 비하면 청탁(淸濁)의 구별은 현격하니, 임금 역시 마땅히 포장(襃獎)하는 뜻을 보여 은일(隱逸)이란 명칭을 이루어 주는 것이 좋습니다.
후세의 임금들은 어진 이를 좋아할 줄은 알면서도 그를 좋아하는 도리를 알지 못하여 작록(爵祿)으로 붙잡아 놓기만 하고 그 말을 채용하지 아니하며, 그로 하여금 진퇴를 곤란하게 하는 임금도 있으며, 《시경(詩經)》에 이른바, “나를 붙잡기를 원수잡듯 해 놓고 나를 등용함에 힘쓰지 않는구나.[執我仇仇 亦不我力]”라는 유와 같습니다. 다만 그 이름만 좋아하고 그 실상을 구하지 않아 하지 못할 일을 억지로 맡겨서 그로 하여금 일을 그르치고 자기를 잃어버리게 하는 임금도 있으니, 진(晉)이 은호(殷浩)를 쓴 것과 같은 유입니다. 다 참으로 어진 이를 좋아하는 임금이 아닙니다.
반드시 사람을 아는 데는 그 총명을 극진히 하여야 하고, 사람을 기용(起用)하는 데는 반드시 그 재능에 적합하게 하여야 하며, 신임하는 데는 반드시 그 정성을 극진히 하여야만 참으로 어진 이를 좋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은 군자의 행실을 분별함에 대한 것입니다.
소인(小人)의 간사함을 분별하는 것에 대하여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비부(鄙夫)와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여(與)는 평성(平聲)이다.
○ 《논어》 아래도 이와 같다. 주자가 말하기를, “비부는 용렬하고 악하며, 비루하고 졸렬한 사람을 칭한다.” 하였다.
"그 벼슬을 얻지 못하였을 때에는 얻으려고 근심하고, 얻고 나서는 잃을까 근심한다."
하씨(何氏)가 말하기를, “얻으려고 근심한다는 것은 얻지 못할까 근심한다는 것이다.” 하였다. ○ 신안 진씨(新安陳氏 진력(陳櫟))가 말하기를, “얻는다는 것은 부귀 권리를 얻는다는 말이다.” 하였다. 정말 잃을까 근심하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작게는 종기를 빨고 치질을 핥아 주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아비와 임금을 죽이는 것까지 다 잃을까 근심하는 데서 나온 말이다.” 하였다. ○ 호씨(胡氏)가 말하기를, “허창(許昌)의 근재지(靳裁之)란 사람이 말하기를, 선비의 품위(品位)에는 대개 세 가지가 있는데, 도덕에 뜻을 둔 이는 공명(功名)으로써 그 마음을 더럽힐 수 없고, 공명에 뜻을 둔 이는 부귀로써 그 마음을 더럽힐 수 없다. 부귀에만 뜻이 있을 뿐이라면 하지 않는 일이 없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부귀에만 뜻이 있다는 것이 곧 공자께서 말씀하신 비부이다.” 하였다.
"말을 교묘[巧]하게 하거나 외모(外貌)를 잘 꾸미는 사람 중에 인인(仁人)이 드물다."(巧言令色 鮮矣仁 교언영색 선의인)
주자가 말하기를, “교(巧)는 잘한다는 것이요, 영(令)은 좋게 꾸미는 것이다. 말을 잘하거나 외모를 좋게 꾸며서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고 힘쓰게 되면, 사람의 욕심이 방자해져서 본심의 덕이 없어진다. 성인은 말을 박절하게 하지 않기 때문에 드물다라고 한 것이니, 전혀 없음을 알 수 있다.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깊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용모와 말씨는 바로 배우는 이가 힘써 길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을 교묘하게 하거나 외모를 잘 꾸며서[巧言令色 교언영색] 사람의 보고 듣는 것을 즐겁게 하려 하면 마음이 밖으로 달려서 인(仁)한 이가 드물다. 만일에 이 용모와 말씨에서 잘 수양해서, 말을 할 때는 조급하지 않게 하고, 행동할 때는 반드시 온화하고 공손하게 하여, 다만 내심을 곧게 하고 외면을 방정하게 하는 실상에 꼭 맞도록 하게 되면 이것은 자신의 인격을 위하는 공부와 인(仁)을 구하는 요체가 될 것이니, 다시 무엇이 병될 것이 있겠는가. 소인은 남의 결점을 들추어내는 것을 정직한 것으로 여기고, 겉으로는 엄한 체하나 안으로는 나약하니, 말을 교묘하게 하거나 외모를 좋게 꾸미는 자와는 다르나 그 감정을 숨기고 거짓을 꾸미는 마음을 살펴보면 실상은 교언영색하는 자보다 더한 사람이니, 성인이 이들을 미워한다.” 하였다.
"자색(紫色)이 주색(朱色)을 빼앗는 것을 미워하며, 정성(鄭聲)이 아악(雅樂)을 문란하게 하는 것을 미워하며, 말을 교묘하게 하는 입[利口]이 나라를 전복[覆]시키는 것을 미워한다."
주자가 말하기를, “주색(朱色)은 정색(正色)이요, 자색은 간색(間色)이다. 아(雅)는 바른 것이요, 이구(利口)는 말이 빠르고 넉넉한 것이요, 복(覆)은 기울어져 무너지는 것이다.” 하였다. ○ 범씨(范氏)가 말하기를, “천하의 일은 대개는 바르게 하여 이기는 사람이 적고, 바르지 못하게 하여 이기는 사람이 많다. 성인이 이 때문에 이들을 미워하는 것이다. 말 잘하는 사람은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고, 그른 것을 옳다고 하며, 어진 이를 불초하다고 하고, 불초한 이를 어질다고 하는데, 임금이 진실로 그 말을 믿으면 국가의 전복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향원(鄕原)은 덕의 적(賊)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원(原) 자는 원(愿) 자와 그 뜻이 같으니,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사람을 말한다. 공자는, ‘그것이 덕인 듯하나 덕이 아니다. 그러므로 덕의 적(賊)이다.’ 하였다.
○ 만장(萬章)이 “한 고을 사람들이 모두 원인(原人 근엄하고 후덕한 사람)이라고 일컫는다면 어디를 가더라도 원인이 아닐 수 없는데, 공자가 덕의 적(賊)이라고 하신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니,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를 비난하려 해도 이렇다 할 비난거리가 없고, 그를 공격하려 들더라도 이렇다 할 공격거리가 없다. 세속과 동조하고 더러운 세상과 합류하여, 들어앉아 있을 때는 충직하고 선의가 있는 듯하며, 나아가 행동할 때는 청렴하고 결백한 듯해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좋아하고 스스로도 옳다고 여기지만 그러한 사람과는 요순의 도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덕의 적이라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탐오(貪汚)하고 아첨하는 것은 소인의 한결같은 태도로 어리석고 어두운 임금이 아니라면 이것을 분변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직 옳은 듯하나 그른 자에 대해서는 비록 밝은 왕이라도 분변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군자는 낯빛을 바르게 하여 곧은 말을 하는데, 소인 중에 외형은 엄격하게 하고 들추어내는 것을 정직한 것으로 여기는 자가 그와 비슷합니다.
또 군자는 행실이 완전하여 결점이 없는데, 소인 중에 삼가고 조심하여 비난하려 해도 비난할 거리가 없는 자가 그와 비슷합니다. 성현이 깊이 경계하심이 당연합니다. 대개 향원은 마음을 감추고 세상에 잘 보여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며, 세속과 부화뇌동하여 고식적이고 비루한 데 처하는 것을 편안히 여기고, 도를 행하는 선비를 억압하고 학문하는 길을 끊어 버리니, 그 해되는 것이 이단(異端)이 세상을 현혹시키는 것보다 더욱 심합니다.
후세의 선비가 만일 향원이라 지목하면 누군들 부끄러워하고 또 노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행위를 살펴보면, 이리저리 재고 몸을 사리면서 녹이나 받아먹다가 옛것을 회복하자는 설을 듣든가 도에 뜻을 둔 선비를 보든가 하면 문득 우활(迂闊)하여 이루기 어렵다고 비웃고, 다만 구습(舊習)을 지키고 미봉하는 것을 일삼으니, 이들 모두가 향원을 본받는 사람들입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상도(常道)를 돌이킬 뿐이다. 상도가 바르면 서민이 흥기한다.” 하였습니다. 상도를 돌이키는 책무를 전하께 깊이 바랍니다. 이상은 소인의 간사함을 분별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군자와 소인에 대한 통론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언론(言論)이 독실한 사람을 이에 친히 한다면 군자(君子)다운 자인가. 얼굴만 엄장(嚴莊)한 자인가.” 하였다. 《논어》 아래도 이와 같다.
주자가 말하기를, “다만 그 언론이 독실하다고 하여 그를 친히 한다면 군자(君子)다운 자인가, 얼굴만 엄장(嚴莊)한 자인가 알지 못하겠다고 말씀한 것이다. 이는 말과 외모(外貌)로 사람을 취해서는 안 됨을 말씀한 것이다.” 하였다.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말을 잘하지만,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 해서 반드시 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진 사람은 반드시 용기가 있으나,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 해서 반드시 어진 것은 아니다.
주자가 말하기를, “덕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화순(和順)하여 밖으로 영화가 발하거니와 말을 잘하는 이는 말만 잘할 뿐이다. 어진 이는 마음에 사사로이 얽매이는 것이 없어서 옳은 것을 보면 반드시 행하지만 용기가 있는 사람은 혈기만 강할 뿐이다.” 하였다.
군자는 작은 것은 알 수 없어도 큰 것은 받을 수 있고, 소인은 큰 것은 받을 수 없어도 작은 것은 알 수 있다.
주자가 말하기를, “안다는 것은 내가 아는 것이요, 받는 것은 상대로부터 받는 것이다. 대개 군자는 작은 일에는 볼만한 것이 없어도 그 재능과 덕망이 족히 두터운 것을 맡을 수 있고, 소인은 비록 도량이 얕고 좁지만 한 가지 장점도 취할 게 없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군자는 의(義)를 깨닫고[喩], 소인은 이(利)를 깨닫는다."
주자가 말하기를, “유(喩)는 깨닫는다는 말과 같다. 의(義)는 천리의 마땅한 것을 말하고, 이(利)는 인정이 하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군자가 의를 대하는 태도는 소인의 이(利)를 대하는 태도와 같다. 오직 깊이 깨닫기 때문에 독실하게 좋아하는 것이다.” 하였다. ○ 양씨(楊氏)가 말하기를, “군자는 생(生)을 버리고 의를 취한다. 이(利)로써 말하면 사람의 하고 싶은 것에 생보다 더 심한 것이 없고, 미워하는 것에 죽음보다 더 심한 것이 없으니, 누가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는가. 그런데도 군자가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는 것은 깨닫는 것이 오직 의뿐이기 때문에 이(利)가 이로움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인은 이와 반대이다.” 하였다.
○ 상산 육씨(象山陸氏 육구연(陸九淵))가 말하기를, “이 장은 의(義)와 이(利)로써 군자와 소인을 판별한 것인데,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여기에서 그 뜻을 분변해야 할 것이다. 사람이 깨닫는 것은 그 습성에 말미암은 것이요, 그 습성은 그 뜻하는 바에 말미암은 것이니, 뜻하는 바가 의(義)에 있으면 익히는 것도 반드시 의에 있게 되어 곧 의를 깨닫고, 뜻하는 바가 이(利)에 있으면 익히는 것이 반드시 이에 있게 되어 곧 이를 깨닫는다.” 하였다.
○ 남헌 장씨(南軒張氏 장식(張栻))가 말하기를, “배우는 사람은 의와 이를 분변하는 것보다 먼저 할 것이 없으니, 의라는 것은 일부러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대개 일부러 해서 되는 것은 다 인욕(人欲)의 사사로운 것이요, 천리(天理)의 공(公)이 아니니, 이것이 의와 이의 구분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의가 일부러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는 말은 앞 성인들의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였다. 대개 성인의 학문은 일부러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끝남이 없는 천명이요, 편벽되지 않은 본성이며, 무궁한 가르침이다. 스스로 우뚝이 의와 이가 천양의 딴판[霄壤之判]이라는 것을 살펴서 생각을 가다듬고 힘써 행해서 밤낮을 쉬지 않으면 참으로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 하는 일이 비록 착하다 하더라도 교제를 맺고 명예를 구하여 비난하는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생각이 혹시라도 마음에 싹튼다면 이것 역시 이(利)일 따름이다.” 하였다.
"군자는 화(和)하면서 동(同)하지 않고, 소인은 동하면서 화하지 않는다."
주자가 말하기를, “화(和)라는 것은 어그러진[乖戾] 마음이 없는 것이요, 동(同)은 아부하여 편당을 든다는 뜻이다.” 하였다.
○ 윤씨(尹氏)가 말하기를, “군자는 의를 숭상하기 때문에 편당 짓지 않으나, 소인은 이(利)를 숭상하니, 어찌 화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 《춘추전(春秋傳)》에 이르기를, “제 경공(齊景公)이 사냥을 갔다가 돌아왔을 때, 안자(晏子)가 모시고 있었는데, 자유(子猶) 양구거(梁丘據)의 자(字)이다. 가 달려오니, 공이 말하기를, ‘오직 자유가 나와 조화를 이룬다.’ 하였다. 안자가 대답하기를, ‘자유는 동조하는 것이니, 어찌 조화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화와 동이 다른가.’ 하였다. 대답하기를, ‘다릅니다. 화는 국을 끓이는 것과 같습니다. 불 위에 물을 올려놓고 식초ㆍ젓갈ㆍ소금ㆍ매실[梅]을 넣어 어육(魚肉)을 삶을 적에 섶[薪]으로써 불을 때고[燀] 전(燀)의 음은 전(戰)이다. 불태운다는 것이다. 요리사가 간을 맞추어 지나친 것을 없게 없앤다는 것은 그 맛이 지나친 것을 덜어서 없앤다는 것이다. 하는데, 군자는 이것을 먹고 그 마음을 화평하게 합니다.
임금과 신하도 역시 그러하니, 임금이 옳다고 하는 것에 옳지 못한 것이 있으면 신하가 그 옳지 못한 것을 말하여 옳은 것을 이루게 하고, 임금이 옳지 않다고 하는 것에 옳은 것이 있으면 신하가 그 옳은 것을 말하여 그른 것은 버리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경》에 이르기를, 「국맛을 고르게 하듯 경계하며 공평하게 한다.」 하였습니다. 지금 자유는 그렇지 못하여, 임금이 옳다고 하는 것에 대해 자유도 옳다고 하고, 임금이 그르다고 하는 것에 대해 자유 역시 그르다고 합니다. 물에 물을 탄 것과 같으니, 누가 먹겠으며, 거문고와 비파 소리가 똑같다면 누가 듣겠습니까. 동조함[同]의 옳지 못함이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하였다.
"군자는 두루 사귀고[周] 편당 짓지 않으며, 소인은 편당 짓고 두루 사귀지 않는다."
주자가 말하기를, “주(周)는 보편적인 것이요, 비(比)는 편당 짓는 것입니다. 둘 다 다른 사람과 친하다는 뜻입니다만 주(周)는 공적인 것이고, 비(比)는 사적인 것입니다.” 하였다.
○ 주자가 승상(丞相) 유정(留正)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기를, “붕당(朋黨)의 화는 진신(縉紳 고관대작)에만 그치는 것인데, 옛날에 붕당(朋黨)을 미워하여 없애고자 하는 자가 왕왕 나라를 망하게 하는데 이르렀습니다. 이는 그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과 충성스럽고 간사한 것을 살피지 않고 오직 당만 없애려고 힘쓰면, 저 소인들은 반드시 교묘한 꾀로 자취를 덮으려 하는 데, 군자는 그 공심(公心)과 바른 도만 믿고 말과 일을 공정하게만 해 나가고 그럴 듯하게 둘러대지 못하다가 이따금 도리어 소인에게 밀려서 편당이라고 지목을 받게 되니, 한(漢) 당고(黨錮)의 화이다.ㆍ당(唐) 청류(淸流)의 화이다.ㆍ송(宋)의 소성(紹聖) 원우당(元祐黨)의 화이다. 의 일들이 먼 옛날의 일이 아닙니다. 승상께서 붕당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나는 승상께서 혹시나 깊이 천하의 현(賢)ㆍ부(否)와 충(忠)ㆍ사(邪)를 살피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대개 문을 닫고 들어 앉아 자신을 지켜 고립되어 붕당 짓지 않는 것은 한 개인의 행실이요, 어질고 능한 이를 맞아들이고 간사하고 음험한 자를 물리쳐서 천하 사람들의 뜻을 합하여 천하의 일을 구제하는 것은 재상의 직책입니다. 어찌 반드시 당이 없는 것만을 옳다고 하고, 당이 있는 것만을 그르다고 하겠습니까. 대개 승상의 오늘의 처지를 보면 당이 없다고 하면 없다고 할 수 있지마는, 소인의 도(道)는 날로 늘어가고 군자의 도는 날로 사라져, 천하의 걱정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된다면 승상이 어찌 그 책임을 피하겠습니까. 저는 어리석은 사람이라 근심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원컨대 승상께서는 먼저 어진 자와 어질지 못한 사람, 충성스러운 사람과 간사한 사람을 분별하는 것으로 자기의 책임을 삼아서, 과연 어질고 충성스러운 사람이면 드러내어 등용하되, 오직 그 당이 많지 않아 같이 천하의 일을 도모하지 못할까 두려워할 것이고, 과연 간사한 사람이면 드러내어 물리치되, 오직 그들을 다 제거하지 못하여 내가 어진 이를 등용하는 공효를 해칠까를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군자들이 당을 짓는 것을 미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당을 짓는 것도 꺼리지 말 것이요, 내가 당을 짓는 것을 꺼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앞으로 임금을 인도하여 당을 짓게 하는 것도 꺼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천하의 일이 거의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신하의 악(惡)은 사당(私黨)보다 더 심한 것이 없고, 임금이 몹시 미워하는 것도 붕당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소인이 군자를 모함하는 데는 반드시 이것을 효시(嚆矢)로 삼으니, 그저 임금이 이것을 살피지 못할까 염려될 뿐입니다. 진실로 이것을 살핀다면 공(公)과 사(私), 충(忠)과 녕(佞 아첨하는 것)을 분변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이른바 살핀다는 것은 다만 그 마음을 살피는 것뿐이니, 그 마음이 임금을 바르게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는가, 몸을 영화롭게 하고 권세를 굳히는 데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임금을 바르게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선비는 도를 함께 하는 사람들과 붕당을 짓기 때문에 일심으로 임금을 사랑하고 일심으로 나라에 충성하여, 당이 성할수록 임금도 더욱 성(聖)해지고, 나라도 더욱 편안해집니다. 임금은 오히려 그러한 당이 적을까 염려할지언정 어찌 그 무리 지어 모여드는 것을 근심하겠습니까. 몸을 영화롭게 하고 권세를 굳게 하는 선비는 이(利)를 같이 함으로써 벗을 삼는 자이니, 이들은 사(私)를 도모하고 공(公)을 무시하며, 임금을 뒤로 하고 부모를 버리니, 그 당은 비록 적더라도 족히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망하게 할 것입니다.
임금은 마땅히 불이 처음 붙을 때에 끄듯이 해야 하니, 어찌 그것이 번성하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그러나 소인의 마음은 다만 이(利)만 구할 뿐이요, 임금과 부모는 돌보지 않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체결된 붕당은 이익이 다 되면 교제가 소원해지고, 형세가 궁박해지면 서로 도모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붕당은 잠깐 합해진[假合] 것일 뿐이어서 군자의 도의에 입각한 붕당과 같이 시종여일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구양수(歐陽脩)가 말하기를, ‘소인은 벗이 없고 오직 군자만이 벗이 있다.’ 하였으니, 이 말이 옳습니다. 아, 상(商)나라 신하는 억만(億萬)이었으나, 그 마음도 억만이었으니 당이 없어서 주(紂)가 망하였다고 할 수 있고, 주(周)나라 신하는 3천이로되 그 마음은 하나였으니 일대의 큰 당이 되어 무왕(武王)이 임금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만 그 마음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임금이 먼저 이(理)를 밝히지 않고 예측과 억측으로 살핀다면, 공(公)을 사(私)라고 하고 녕(佞)을 충(忠)이라 하지 않는 이가 드물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학문은 이(理)를 밝히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의 과실에는 각각 유형이 있다. 과실만 보아도 그 사람의 어짊을 알 수 있다."
주자가 말하기를, “당(黨)은 유(類)이다.” 하였다. ○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사람의 과실은 유마다 다르다. 군자는 항상 후한 데서 실수하고, 소인은 항상 야박한 데서 실수한다. 군자는 사랑하는 데서 지나치고 소인은 지나치게 잔인하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지나치게 청렴하고, 소인은 지나치게 탐(貪)하며, 군자는 절개를 지키는 데서 지나치며 소인은 누구라도 다 알고 지내려는 데서 지나친 것이 모두 이런 유이다. 그러나 또한 이에만 그치지 않는다. 다만 이런 것에 나아가 보면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않은 것을 볼 수 있고 인의 기상을 또한 알 수 있기 때문에 이로써 그 사람의 어진 것을 알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 말은 또 사람이 비록 과실이 있다 하더라도, 그 과실의 유에 따라서 그 사람이 후한 사람인가 박한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는 것이요, 반드시 허물이 있는 것을 기다린 뒤에야 그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 진씨(眞氏)가 말하기를, “임금은 신하에게 과실이 있으면 그 마음을 살펴보아야 한다. 만일 임금을 사랑해서 극진히 간(諫)한다면 지나치게 파헤치는 과실이 없지 않지만, 요컨대 그 용심(用心)은 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어진 것은 취하고 과실은 너그럽게 봐 주는 것이 옳을 것이다. 임금을 사랑해서 임금의 명령을 어기게 되면 지나치게 바로잡는 과실이 없지 않지마는, 요컨대 그 용심은 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그 어진 것은 취하고 그 과실은 용서해 주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간사한 신하들은 덮어서 가리기를 잘하기 때문에 꼭 지적할 만한 과실은 없다. 그러나 그 마음은 어떠한가. 대개 이것은 다 사람을 관찰하는 한 가지 단서인데, 이를 유추하여 구해 보면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하였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임금을 잘 섬기기만 하는 자는, 임금을 섬기게 되면 임금에게 잘 보여 임금을 즐겁게 하는 자다.” 하였다. 《맹자》 아래도 이와 같다. 주자가 말하기를, “아첨해서 잘 보이려 하고 임금의 뜻에 맞추어서 즐겁게 하는 것은 비부(鄙夫)의 일이요, 첩부(妾婦)의 도이다.” 하였다. 사직(社稷)을 편하게 한다는 신하는 사직을 편하게 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 사람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대신이 사직을 편하게 하는 것을 꾀하는 것은 마치 소인이 그 임금을 즐겁게 하는 데 힘쓰는 것과 같아서, 여기에 항상 마음을 쓰고 잊지 않는다.” 하였다.
"천민(天民, 하늘이 주신 백성)이란 것은 천하에 행할 수 있은 뒤에야 행하는 사람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백성이란 지위가 없는 자를 일컫는다. 그가 천리(天理)를 온전히 다하는 하늘의 백성이기 때문에 천민(天民)이라고 한다. 반드시 그 도를 천하에 행할 수 있은 뒤에야 행하고,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죽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더라도, 그 도를 조금 써서 남을 따르려 하지 않는다.” 하였다. ○ 장씨(張氏)가 말하기를, “반드시 공이 이 백성을 덮을 만한 뒤에 나가는 것이니, 이윤(伊尹)과 여상(呂尙) 같은 이가 그러하다.” 하였다.
"대인(大人)은 자기 몸을 바르게 하여서 남도 바르게 하는 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대인은 덕이 성하여 위아래가 화(化)해지는 것이니, 이른바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見龍在田] 천하가 문명(文明)해진다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사람의 인품이 같지 않으나 대략 네 등급이 있다. 마음에 들려고 아첨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사직을 편하게 하는 이는 충성스럽긴 하나 아직 일국의 선비이다. 천민(天民)은 일국의 선비는 아니지만 오히려 포부를 지닌 이다. 뜻도 없고 기필하는 것도 없지만 오직 그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물(物)이 화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오직 성인이라야 그렇게 할 수 있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주자가 말하기를, “사람을 알기가 어렵다는 것에 대해서 요순도 병통으로 여겼으며, 공자도 ‘그 사람의 말을 듣고 그 사람의 행실까지 보아야 한다.’고 경계한 바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이것은 다만 소인을 두고 한 말이다. 만일 모두가 군자라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대개 천지간에는 자연의 이치가 있다. 양(陽)은 반드시 강(剛)하고 강하면 반드시 밝고, 밝으면 알기가 쉽다.
음(陰)은 반드시 유(柔)하며 유하면 반드시 어둡고, 어두우면 헤아리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성인이 《주역(周易)》을 지을 때에, 양을 군자로 삼고, 음을 소인으로 삼았다. 그 유(幽)와 명(明)의 소이연에 통하고, 만물의 정에 따라 분류한 것은, 비록 백세(百世)가 되더라도 바꿀 수 없다. 일찍이 역설(易說)을 미루어 천하 사람들을 살펴보니, 대체로 광명정대하고 널리 통달하여,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고, 높은 산이나 큰 냇물 같으며, 뇌정(雷霆)의 위엄 같고, 우로(雨露)의 윤택 같으며, 용호(龍虎)의 용맹 같고 인봉(麟鳳)의 상서(祥瑞)와 같아 도량이 넓고 깨끗하여 추호도 의심스러운 것이 없는 이는 분명 군자이다.
알랑거리고 혼탁하며, 그럴듯하게 둘러대고 숨고 감추어 주어 뱀이나 지렁이처럼 서로 얽히고, 서캐와 이[蟣蝨]처럼 좀스럽고, 귀신과 물여우처럼 홀리고, 도적처럼 저주하고, 재빠르고 교활한 것을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자는 분명 소인이다.
군자와 소인의 기준이 마음속에 정해지면, 세세한 말씨나 행동으로 겉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니 더구나 사업이나 문장(文章, 글과 책)에서야 찬연히 드러나지 않겠는가. 소인을 알아내기가 어렵다고 하나, 이렇게 본다면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주자의 이 말이 군자와 소인의 정상(情狀)을 다 갖추었으니, 전하께서 이것으로 사람을 관찰한다면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군자와 소인은 음양이나 주야(晝夜)와 같아서 매양 서로 반대되나, 큰 요체는 임금을 사랑하는 사람은 군자요, 작록을 사랑하는 사람은 소인입니다. 대개 소인은 그 임금이 명철하건 어리석건 헤아리지 않고 다만 작록에만 마음이 있기 때문에, 만약 자기를 이롭게만 하면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어서 군부(君父)를 속이고, 국맥(國脈)을 손상하게 한다 할지라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작록의 권리가 임금에게 있으면 임금에게 아첨하고, 권신과 행신(幸臣)에게 있으면 권신과 행신에게 붙으며, 외척에게 있으면 외척과 결탁하고, 심지어는 적국과도 몰래 내통하여 마치 개가 주인에게 짖고 물어뜯듯이 하는 것까지도 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좋아하는 것이 작록이니 어느 겨를에 임금을 사랑하겠습니까.
군자는 그렇지 아니하여 사직(社稷)을 마음에 두고 생민을 생각하니, 진실로 임금을 바르게 할 수만 있다면 다른 것에는 애착이 없습니다. 의(義)가 직분을 지키는 데 있으면 군명(君命)이라도 따르지 않을 때가 있고, 의가 말을 다하는 데 있으면 임금의 위엄도 피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의리를 밝히고 가리고 미혹하는 것을 막아 임금을 인도하되 도에 합당하도록 해서, 임금으로 하여금 과오가 없는 처지에 서도록 합니다.
만일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거나 간언(諫言)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서 녹만 먹고 나라에 보탬이 되는 것이 없다면, 몸을 받들어 물러가는 것 또한 그만둘 수 없을 것입니다. 초야에 묻혀 살면서 밥 먹는 사이에도 잊지 않고 임금이 느껴 깨닫기를 바라나니 물러났다 하여 벼슬할 때와 마음을 달리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임금이니, 어느 겨를에 작록을 탐내겠습니까. 말속(末俗)이 넘실대고 도학이 밝지 않아, 신하는 이미 임금을 바르게 할 뜻이 없고, 임금 역시 사람들이 순종하는 것만 좋아하여, 작록을 탐하는 자를 임금을 아끼는 자라고 여기고, 임금을 아끼는 자를 임금을 원망하는 자라고 여기니, 아, 탄식할 만한 일입니다. 이상은 군자와 소인을 통틀어 논한 것입니다.
-이이(李珥 1536~1584), 『율곡전서(栗谷全書) / 율곡선생전서 제24권 /성학집요(聖學輯要) 6 /제4 위정(爲政) 상(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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