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고개를 숙이고 도적의 무리에 휩쓸릴 수는 없다
선비가 성현의 말씀을 암송하고 성현의 행실을 몸소 실천하는 것은, 장차 마음에 품은 뜻을 소중하게 여겨 지키고, 덕(德)을 기르고 베풀기를 힘써 노력하려는 것이다. 지금 길을 같이하여 나아가고, 문을 같이하여 들어가며 뜰을 같이하여 달리는 자들은 백 명 천 명의 사람이 모두 도적들이다. 유독 나만 홀로 성현의 말씀을 암송하고 성현의 행실을 애써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듯하다. 그럴진대, 어찌 내가 세속의 부패한 권세와 불의한 권위에 고개를 숙일 것이며, 꽁무니를 쳐들어 두려워하고 전전긍긍하며 도적의 무리를 뒤쫓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이런 이치는 결코 없는 법이다.
내가 들으니, '청렴한 자는 갓과 의복이 바르지 않은 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내세우는 명분이 의리에 어그러지면 군자는 과감히 수레를 돌려서 떠나간다'고 하였다. 하물며 그 실정이 도적의 무리들이라면 오죽 하겠는가!
만약에 누군가가 길 위에 땅을 파서 함정을 만들고 그 위에 비단을 덮어놓으면 사람들은 미처 알지 못하고 그 곳을 밟고 지날 것이다. 위로는 부모와 형제, 아래로는 처자와 하인, 벗, 손님의 무리에 이르기까지 진실로 그것이 함정인 줄 아는 자가 있다면, 누구가 되었던 반드시 맨발로 뛰쳐나와 소리치고 달려가 잡아끌어 함정 근처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할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위로 부모와 형제, 아래로 처자와 하인, 벗, 손님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사람을 부추겨서 그 함정으로 나아가게 하니, 어찌 은혜가 없어서 그렇게 하겠는가? 단지 함정 위를 덮은 화려한 비단만을 보고, 그 함정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실로 그것이 함정인줄 미리 알고 있다면, 반드시 함정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 나아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마땅히 그러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함정인 줄 알면서도, 부모, 형제, 처자, 하인, 벗, 손님의 강요에 못이겨서 마지못해 억지로 달려가 생명을 버리고자 스스로 함정에 빠지는 자가 있단 말인가?
-홍길주(洪吉周, 1786∼1841), '정세익에게 보낸 편지'(與鄭景守書表兄世翼), 『현수갑고(峴首甲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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