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아 주는 자
내가 우중(雨中)에 누워서 일생 동안 남에게 빌린 물건을 생각해 보니 낱낱이 셀 수 있었다. 내 성품이 매우 옹졸하여 먼저 남의 눈치를 살펴서 어렵게 여기는 빛이 있으면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상대방이 내게 대하여 조금도 인색하지 않음을 확실히 안 뒤에야 비로소 말했다. 남의 말이나 나귀를 빌린 것은 단지 6~7회뿐이고, 그 외는 모두 걸어다녔다. 혹시 남의 하인이나 말을 빌리면 그 굶주리고 피곤함을 생각하여 마음이 매우 불안하였으니, 결코 천천히 걸어다니는 것만큼 편치 못했다.
부모님이 병중에 계셨는데도 약을 지을 길이 없어서 친척에게 돈 백 문(文)과 쌀 몇 말을 빌린 일이 있다. 일찍이 아내가 병들어 원기(元氣)가 크게 쇠하였으므로 친척에게 약을 빌었는데 마음이 서먹하여, 부모님의 병환 때에 구(求)하는 것과 같지 않았다. 물정에 어두워서 때로 일을 그르치기도 했지만 역시 크게 욕됨은 면했다.
※(옮긴이 주: 당시 화폐가치로 1냥이 400문으로 쌀 10말 가치다. 따라서 돈 100문으로는 쌀 2.5말을 살 수 있다. 참고로 19세기초 집한채(초가3칸) 가격이 평균 15냥이었다. 1894년에 이르러 은본위제 화폐개혁으로 1냥이 100문(닢)으로 정해졌다)
내 평생에 큰 병통이 있으니, 나같이 세상 물정에 어둡고 처세에 졸렬한 자를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산수(山水)를 논하고 문장을 이야기하고 민풍 요속(民風謠俗)에 이르기까지도 되풀이하며 담론하여서 그칠 줄 모르며, 해학(諧謔)과 웃음을 섞어 가면서 흉금을 털어놓고 밤을 새우니, 남은 내가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임을 알지 못한다.
만약 상대방과 취미가 서로 맞지 않아서 남이 말하는 것을 내가 알아듣지 못하고 내가 말하는 것을 남이 알아듣지 못한다면 비록 억지로 웃고 말하려 하여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무정하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나를 알아주는 자에게는 다 말할 수 있지만 나를 몰라주는 자에게는 말할 수 없다'(伸於知己 屈於不知己者)는 말이 실지에 맞는 표현이다. 매양 기운을 내어 사람들 속에 섞이려 애쓰지만 나이 30이 가깝도록 제대로 하지 못하니 한스럽다.
내 몸이 파리하고 연약하여 입은 옷조차도 견디지 못할 정도이지만, 남의 음험(陰險)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보면 가슴속에서 뜨거운 혈기가 솟구쳐 올라 곧 손을 들어 치려 하니, 이는 군자의 너그럽게 포용하는 도량이 아니다. 내가 항상 경계하여 말하지 않고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모든 것을 그대로 보아 넘기기를 오래 했더니 이에 심상(尋常)하여져서 마치 바보처럼 되었다.
이리하여 남들이 나를 시비를 모르는 자로 의심하기도 하고 혹 자기 편의(便宜)만을 도모하는 사람으로 지목하기도 하며, 혹 노자(老子)의 도(道)를 좋아한다고 하기도 하는데, 나 또한 이를 달게 여겨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것이 어찌 참으로 내 마음을 아는 자이랴.
도량이 매우 좁아서 세도(世道)를 만회(挽回)할 만한 올바른 기력(氣力)이 없으면서, 내 한 조각 객기(客氣)가 남을 욕하고 비판한다면 어찌 몸을 욕되게 하는 요인(要因)이 되지 않으랴. 내 말을 받아들여서 선(善)을 하기에 민첩한 자가 있다면 내 어찌 그 허물을 남김없이 말하지 않으랴.
소인의 무리가 사소한 이익에 집착(執着)되어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볼 적마다, 혼자서 탄식하고 꾸짖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관(冠)을 찢어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려고도 했고 굴평(屈平)의 회사(懷沙)*와 포초(鮑焦)의 입고(立枯)*를 부러워도 했다. 그러나 눈을 감고 시간을 보내면 화기(火氣)가 비로소 가라앉고 도리어 자신의 속이 너무 좁은 것을 느낀다.
이에 마침내 관평(寬平)ㆍ화완(和緩)ㆍ유원(悠遠)ㆍ허정(虛靜) 등 자의(字義, 글자의 의미)를 생각하면 심계(心界)가 비로소 편안하고 고요해진다. 그렇지만 답답할 때가 많고 편안할 때가 적으니 이것은 객기(客氣)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 유자(儒者)의 함양하는 법을 얻어서 이를 바로잡으랴.
※[역자 주]
1. 굴평의 회사(懷沙) : 굴평이 지은 글. 전국 시대 초(楚) 나라 사람 굴원(屈原)이 간신의 참소로 추방당하고 실의(失意)에 빠져 유랑하다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죽을 때에 회사부(懷沙賦)를 지어서 자기의 뜻을 술회했다.《史記 屈原列傳》
2. 포초(鮑焦)의 입고(立枯) : 포초는 주(周) 나라 때 은자(隱者)로 밭을 갈아서 먹고 우물을 파서 마셨으며 아내가 길쌈한 옷이 아니면 입지 않았다. 어느 날 굶주려서 산 속에 있는 대추를 따 먹는데 어떤 이가 ‘그 대추는 그대가 심은 것인가?’ 했더니, 먹은 것을 토해 버리고 그 자리에서 말라 죽었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제 53권/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6』 중에서-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남만성 (역) ┃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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