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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분수를 알고 마음을 지키는 사람

이장 대재(李丈 大載)씨가 면천(沔川)에서 나의 해장정사(海莊精舍)에 들러 담소하다가 청하기를, “내가 면천에서 객지 생활을 한 뒤로 일찍이 개밋둑이나 달팽이 껍질 같은 집이라도 나 하나 살 만하고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이제 와서야 안간힘을 쓴 끝에 비로소 겨우 들어가 살 만한 소옥(小屋)을 갖게 되어 건조하고 습기찬 것과 춥고 더운 것을 피할 수 있게끔 되었다. 이 집이 비좁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긴 하나 나의 거처로는 안성맞춤이라서 내 입장에서는 대궐 이상으로 느껴지기만 한다. 내가 일찍이 통인(通人 박람다식(博覽多識)한 인물) 권여장(權汝章 권필(權韠))의 말을 들어 보건대 ‘나의 밭을 갈아 먹고 나의 샘을 파서 마시며 내 천명을 지키면서 내 생애를 마치련..

[고전산문] 옛사람은 문장을 지을 때 반드시 정성을 다하였다

구양공(歐陽公 송(宋) 나라 구양수(歐陽脩))이 만년(晚年)에 이르러 평생 동안 자기가 지은 글을 스스로 정리해 놓았으니, 지금의 이른바 《거사집(居士集)*》이라는 것이 그것인데, 왕왕 한 편의 글을 두고 몇십 번이나 읽으면서도 며칠이 지나도록 그 글을 문집 속에 수록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하지 못한 채 고민하기도 하였다. 또 백낙천(白樂天 낙천은 당(唐) 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자(字)임)의 시로 말하면 막힘이 없이 유창(流暢)하기만 하여 글을 다듬느라 고심(苦心)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뒤에 그 초본(抄本)을 얻어 보니 뜯어고친 흔적이 낭자하더라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결코 허술하게 넘기려 하지 않았던 옛사람의 문장에 대한 이러한 태도야말로 우리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일이 아..

[고전산문]시(詩)는 진실된 것이 우러나야

시(詩)는 하늘이 부여한 은밀한 장치(天機 천기)다. 시는 소리를 통해서 울리고 독특한 기운(色澤 색택)를 통해서 빛을 발한다. 맑고 탁한 것, 고상한 것과 속된 것이 시를 통해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다. 만약 시가 소리와 색택뿐이라면 사리에 어둡고 식견이 좁은 사람도 도연명의 운율을 가장할 수 있을 것이요 악착스러운 필부도 이태백의 구절을 모방할 수 있을 것이다. 운률을 가장하고 구절을 모방한다할지라도 있는 그대로 본래의 참 모습을 표현하는데에 지극한 공을 들이면 좋은 시가 된다. 하지만 그저 본뜬 것에 그치면 분수를 넘어선 잡스런 것이 되고 만다. 이는 무슨 까닭인가? 그속에 있는 그대로의 진실하고 올바른 것이 담겨있지 않기때문이다. 진실하고 올바른 것이란 무엇인가? 천기(天機, 하늘이 부여..

[고전산문]문채(文彩)의 중요성

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자들이 걸핏하면 ‘사달(辭達)*’을 구실로 삼곤 한다. ‘사달’이라는 말이 물론 성인께서 하신 말씀이긴 하다. 그러나 또 “말한 것이 문채가 나지 않으면 멀리 전해질 수 없다.(言之不文 行而不遠)”고 유독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대저 자신의 의사를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었다면, 이제 그 바탕을 마련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문채(文彩)**가 더 가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빈빈군자(彬彬君子)라고 일컬어지면서 후세에 불후(不朽)하게 전해질 수가 있겠는가. 이와 관련하여 한자(韓子, 한유(韓愈))는 말하기를 “오직 상투적으로 쓰는 진부한 말들을 제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唯陳言之務去)”라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예로부터 지금까지 글을 짓는 자들을 어찌 ..

[고전산문]무두지학(無頭之學): 머리없는 학문

덕(德)에 흉함도 있고 길함도 있다는 데 대한 변(辨) [德有凶有吉辨]월과(月課)로 지은 것 한자(韓子)의 원도(原道)에 이르기를, “도(道)와 덕(德)은 허위(虛位, 빈자리, 즉 뚜렷하게 정의됨이 없음)이다. 그러므로 도에는 군자의 도와 소인의 도가 있고, 덕은 흉덕(凶德)과 길덕(吉德)이 있다.” 고 하였는데, 내가 옳지 않다고 여겨 왔기에 이것을 변론해 보려고 한다. 덕은 얻는 것이니, 선(善)을 행하여 마음에 얻는 것을 덕(德)이라고 한다. 하늘이 뭇 백성을 낳았으니 물(物)이 있으면 법칙이 있다. 그러므로 일상생활 속에서 각각 마땅히 행하여야 할 도(道)가 있으니,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은 마땅히 얻어야 하는 것이다. 마땅히 얻어야 할 것을 얻는 것을 덕이라 하니, 얻어서는 안 되는 것을 얻는 ..

[고전산문] 술을 데우는 주로(酒鑪)를 보며

대저 주로(酒鑪, 술이나 물을 끓일 수 있는 화로)의 물건 됨됨이를 보건대 그 이치에 본받을 만한 것이 있고 그 공효(功效)상으로 폐(廢)하지 못할 점이 있다 하겠다. 이치상으로 본받을 만한 점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불이 쇠를 이길 수 있는데도 쇠가 오히려 불을 담고 있고, 물이 불을 끌 수 있는데도 불이 거꾸로 물을 끓이고 있으니, 이는 이들을 잘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세상을 경륜(經綸)할 때에도 강함과 부드러움을 함께 쓰면서 서로 피해를 받지 않게 하고, 강한 자와 약한 자를 동시에 구제하면서 서로 어긋나지 않게 하는 것이니, 이것 역시 대체로 볼 때 앞서 말한 방법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것이 바로 이치상으로 본받을 만한 점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공효상으로..

[고전산문] 바보를 파는 아이(賣癡獃)

거리에서 아이들이 외치고 다니면서 팔고 싶은 물건이 하나 있다고 한다. 무엇을 팔려느냐 물어보았다. "끈덕지게 붙어 다녀 괴롭기만한 바보를 팔겠다"고 한다. 늙은이가 말하기를, "내가 사련다. 그 값도 당장에 치뤄 줌세. 인생살이에 지혜는 내 그리 바라지 않는다. 지혜란 원래 시름만 안길 뿐이다. 온갖 걱정거리 만들어 내 평정심을 깨뜨리고, 온갖 재주 다 부려 약삭빠른 이해타산에나 쓰일 따름이다. 예로부터 꾀주머니로 소문난 이들의 처세는 어찌 그리도 야박하고 구차했던가. 환하게 빛나는 기름 등불을 보라. 자신을 태워 스스로 없애지 않는가. 짐승도 그럴 듯한 문채가 있으면 끝내 덫에 걸려 죽고야 만다. 그러니 지혜란 없는 게 낫다. 더우기 바보가 된다면 더욱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네게서 바보를 사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