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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알아 주는 자

내가 우중(雨中)에 누워서 일생 동안 남에게 빌린 물건을 생각해 보니 낱낱이 셀 수 있었다. 내 성품이 매우 옹졸하여 먼저 남의 눈치를 살펴서 어렵게 여기는 빛이 있으면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상대방이 내게 대하여 조금도 인색하지 않음을 확실히 안 뒤에야 비로소 말했다. 남의 말이나 나귀를 빌린 것은 단지 6~7회뿐이고, 그 외는 모두 걸어다녔다. 혹시 남의 하인이나 말을 빌리면 그 굶주리고 피곤함을 생각하여 마음이 매우 불안하였으니, 결코 천천히 걸어다니는 것만큼 편치 못했다. 부모님이 병중에 계셨는데도 약을 지을 길이 없어서 친척에게 돈 백 문(文)과 쌀 몇 말을 빌린 일이 있다. 일찍이 아내가 병들어 원기(元氣)가 크게 쇠하였으므로 친척에게 약을 빌었는데 마음이 서먹하여, 부모님의 병환 때에 구(..

이심설[怡心說 ]: 마음을 기쁘게 한다는 것에 대하여

몸이란 본래 하나뿐이고, 마음도 또한 하나뿐이다. 비록 피와 살이 서로를 감싸고 신경과 힘줄, 근육과 피부로 서로 긴밀하게 연락되어 몸을 싸고 보호하고 있으나, 그 견고함은 나무나 돌ㆍ쇠 따위만 못하니 어떻게 오래 갈 수 있겠는가?또 이른바 칠정(七情 희(喜)ㆍ노(怒)ㆍ애(愛)ㆍ낙(樂)ㆍ애(哀)ㆍ오(惡)ㆍ욕(欲)의 정)이란 것이 감정으로 몸에 느껴져서 마음과 몸이 서로 울리고 뒤흔들기를 마지않는다. 그래서 칠정이 과하면 마음에서 몸으로까지 영향을 끼쳐 검은 머리카락은 변하여 희게 되고, 불그레하던 얼굴은 변하여 창백하게 되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병들어 죽게 되는 것이 모두 이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세상에 어찌 칠정이 없는 사람이 있으며, 사람이 또 어찌 칠정이 없는 날이 있겠는가? 또 보통 이하의 ..

면강(勉強): 억지로라도 힘써야 할 것

사람의 마음쓰는 은미한 곳은 쉽게 볼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일로써 각박한 자를 알아볼 수 있다. 무릇 남이 의외의 요절(夭折, 젊은 나이에 일찍 죽음)과 비상한 액운과 놀랍고 가련한 일을 당한 이야기를 듣고서 조금도 탄식하는 말과 측은해 하는 기색이 없는 자는 인간의 정리(正理)가 아니니, 어찌 남의 재앙(災殃)을 좋아하고 앙화(殃禍, 인과관계로 인해 받는 온갖 재앙)를 즐거워하지 않는다고 보장하겠는가? 이러한 사람들은 남이 패역(悖逆,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에 어긋나고 순리를 벗어남)하게 구는 것을 보아도 미워할 줄 모르고 남의 은애(은혜와사랑)를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면서 으레 있는 일로 여길 뿐이니, 어찌 이들이 효자ㆍ충신이 되기를 바라겠는가? 이러한 점을 가지고 사람을 살펴보면 백에 ..

적언찬병서(適言讚幷序) : 참됨으로 이끄는 8가지

만물(萬物)은 참됨을 통해 이루어지고, 만사(萬事)는 참됨을 통해 행해진다. 그러므로 진짜를 심는 것을 가장 먼저 해야 한다. 이미 진짜를 심은 뒤에 운명을 관찰하지 않으면 꽉 막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다음에는 운명을 관찰해야 한다. 이미 운명을 관찰한 다음에는 잡다한 것에 현혹되는 것을 병(病)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방탕에 젖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다음에는 마음을 다스려 잡다한 것에 미혹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이미 잡다한 것에 미혹되는 것을 경계한 뒤에 다른 사람의 헐뜯음으로부터 도피하지 않으면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헐뜯음으로부터 멀리 도피하는 것을 그 다음에 두었다. 헐뜯음으로부터 멀리 도피했는데도 영혼이 즐겁지 않으면 온 몸이 삐쩍 마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에 좋은..

내 앞에도 내가 없고 내 뒤에도 내가 없다

석록(石綠, 공작석, 녹색)으로 눈동자를 새겨 넣고 유금(乳金)으로 날개를 물들인 나비가 붉은 꽃받침에 앉아 펄럭펄럭 긴 수염을 나부끼고 있다. 영악한 날개깃을 드러나지 않게 엿보며 총명한 어린아이가 오랫동안 도모하다가 갑자기 때리고 문득 낚아챘지만 살아 있는 나비가 아니요 저 그림속의 나비였도다. 아무리 진짜에 가깝고 몹시 닮아 거의 같다고 해도 모두 제이(第二)의 위치에 자리할 뿐이네. 또한 진짜에 가깝고 몹시 닮아 거의 같은 것이 어디에서 기원(起源)하는지 살펴보라! 본바탕을 먼저 엿보아야 가짜로 인해 구속당하지 않으니 만 가지 종류의 온갖 사물은 이 나비의 비유를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병효(讚之一 植眞): 진짜를 심음》 인간의 큰 근심은 혼돈이 뚫린 태초부터 발생하여 꾸미고 수식함은 넘쳐나고 진..

현명한 사람도 피할 수 없는 것

고매한 사람이 속인(俗人)을 대하면 졸음이 오고, 속인이 고매(인격이나 품성, 학식, 재질 따위가 높고 훌륭함)한 사람을 대해도 졸음이 오는 것은 서로 맞지 않기 때문인데, 속인이 조는 것은 비루하여 말할 것이 없거니와 고매한 사람이 조는 것은 어찌 그리 마음이 협소한지. 만일 참으로 고매한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졸지 않을 것이니, 왜냐하면 능히 남을 용납하기 때문이다.한(漢) 나라 문장들은 자기와 다른 사람은 용납했고, 송(宋) 나라 문장들은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배척했고, 명(明) 나라 문장들은 자기와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또한 꾸짖거나 원수처럼 여긴 사람도 있었으니, 원미(元美)의 무리는 업신여긴 사람들이고 중랑(中郞 원굉도(袁宏道))의 무리는 꾸짖은 사람들이며 수지(受之 전겸익(錢謙益))의 무리는..

섭구벌레(섭구충)

박미중(朴美仲 미중은 연암 박지원(朴趾源)의 자)이 나와 한 마을에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글을 이야기할 때 아취가 혹 서로 비슷하였다. 문(文)은 해학을 써서 적이 자기 마음을 나타내곤 하였다. 일찍이 나에게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를 보여줄 것을 요구하여 서신이 세 차례나 왔으므로 내가 승낙했다가, 다음 날 서신을 보내 찾아오며 이르기를, “귀와 눈은 바늘구멍 같고 입은 지렁이 구멍 같으며 마음은 개자(芥子, 겨자씨와 갓씨)만하니, 대방가(大方家, 문장이나 지식 과 학술이 두루 뛰어난 사람)의 웃음을 자아내기에 알맞을 뿐이다.” 하였더니, 미중이 나의 서신 사이에 주(註)를 달기를, “이 벌레의 이름이 무엇인지 박물자(博物者 모든 사물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이)는 해명하라.”하였다. 내가 또 서신을 보..

과설(過說 ): 허물과 과실은 남모르게 고치는 것

어떤 사람이 자기 허물을 뉘우치고 고칠 것을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선생에게 물으니, 선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좋구나. 질문이여! 사람이 허물이 있지 않은 자가 드물고, 허물이 있더라도 그것을 아는 자가 매우 드물며, 또 허물을 알아서 후회하는 자가 더욱 드물고, 후회해서 고칠 것을 생각하는 자는 거의 없을 지경이다.그런데 그대는 보통 사람들과 같이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허물을 고쳐서 사람들이 거의 하지 않는 경지에 나아가는 것을 도모하니, 그대의 과실은 고칠 것을 기다릴 것도 없이 고쳐 졌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비록 그러하지만 그대는 오히려 삼가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와 견해를 같이하지 않는 것을 싫어하고 다른 사람의 훌륭한 점을 이뤼주는 것을 싫어한다. 그대가 옛날..

의로운 개 (韓狗篇,)

막내 아우 서도에서 돌아와서는'한구문(韓狗文)' 한 편 글을 내게 보인다. 읽다간 두 번 세 번 감탄하노니 이런 일 세상엔 정말 드무네. 역사가는 기술을 중히 여기나 기려 찬송 하는 건 시인 몫이라, 두 가지 아름다움 갖춰야겠기, 내 마땅히 다시금 노래하려네. 이 개는 평안도 강서 산으로 주인인 한(韓)씨는 너무 가난해, 기르는 짐승이란 이 개 뿐인데, 날래고 영특하기 짝이 없었지. 주인을 잘 따르고 도둑 지킴은 개의 본성이거니 말할 게 없네. 사람으로 치자면 충효의 선비, 지혜와 용기를 두루 갖춘 격. 가난한 살림이라 하인도 없어 개 시켜 물건 사러 보내곤 했지. 보자기를 그 귀에 걸어놓고서 글씨와 돈 거기다 매달아 주면, 시장 사람 달려오는 개를 보고는 한씨집 개인줄을 으레이 알아, 글을 보고 살 물..

용렬한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도덕과 인문을 논할 수는 없다

온 나라 백성이 모두 나뉘어져 둘로 갈라졌다가 셋으로 나뉘었다가 넷으로 쪼개진 것이 이백여 년이나 지속되어 다시는 서로 합치지 못한다. 누가 사악하고 누가 정의로운지, 누가 역신이고 누가 충신인지 끝내 밝혀져 정론으로 매듭지을 수 없는 붕당은 오로지 우리나라만 그러하다. 고금 붕당의 역사에서 제일 크고 제일 오래가고 제일 밝혀 말하기 어려운 것이리라! (중략)무릇 천하의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몸이 있으면 자신의 마음이 있다. 자기 자신에게 이롭게 하고자 남과 경쟁하기를 즐기고 남에게 양보하기를 부끄러워하는 것은 형세가 그럴 수밖에 없다. 옛 성인들이 이를 걱정하여 예법을 높여서 외형을 균등하게 만들고, 산을 밝혀서 근본을 동일하게 했다. 사람들로 하여금 난폭하고 쟁탈하려는 기운을 극복하여 화목하고 공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