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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도(道)와 문(文)은 구별해야 한다 / 유한준

사마천․반고(사마천은 사기, 반고는 한서, 즉 공통점은 역사서를 저술하였다)의 학문이 정자․주자(정희와 주희,유교에서 성리학을 완성시킨 학자)만 못한 것은 어린애도 알고 있습니다. 학문으로 따지자면 사마천․반고의 문장이 의당 지극하지 못해야 마땅할 듯하지만, 문장으로 따지자면 오히려 정자․주자의 윗 자리에 있습니다. 정자․주자는 심오한 경지에 이른 자신들의 학문을 가지고도 문장에 있어서 만큼은, 사마천․반고의 아래 자리로 밀려나온 것은 과연 무엇 때문입니까? 만일 정자․주자의 문장이 사마천․반고의 문장만 못하다고 여겨 그들의 도(道)가 지극하지 못할 것이라고 의심한다면, 천하에 그러한 이치란 없습니다. 만약 사마천․반고의 문장이 도(道)에서 이탈한 것이라 생각하여 문장의 모범으로 삼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고전산문] 사람이 그 아는 바를 능히 행할 수 있다면 / 홍대용

영남(嶺南, 경상도 지역)은 본디 동국(東國)의 관민(關閩, 송대의 관중과 민중 지역을 가리킴, 즉 학문이 융성한 곳)이라 일컫는다. 회재(晦齋, 이언적)와 퇴도(退陶, 이황)가 앞서 인도하고, 한강(寒岡, 정구)과 여헌(旅軒, 장현광)이 뒤에 잇달았으니, 염락(濂洛, 염계와 낙양으로 도학(道學 성리학)의 근원지, 즉 저명한 성리학자들이 많이 살던 곳)의 시절이 이때에 융성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김우옹(金宇顒)과 정인홍(鄭仁弘)이 앞서 변고를 일으키고 정희량(鄭希亮)과 이인좌(李麟佐)가 뒤에 난리를 일으켰으니, 어진 이와 정직한 자를 모해(꾀를 써서 남을 모함하여 해를 끼침)하는 의론과 하늘을 욕하고 해를 꾸짖는 무리들이 잇달아 일어났다. 그러므로 빙 둘러있는 72주(州)가 이적(오랑캐)ㆍ금수..

[고전산문] 척하는 것을 경계하고 삼가한다 / 김정희

나는 《역(易), 주역》을 읽고서 건(乾) 구삼(九三)의 의(義)*에 깊이 느낌이 있어 나의 거실의 편액을 ‘척암(惕庵, 두려워할 척, 암자 암)’이라 했다. 김진항(金鎭恒)이라는 자가 있어 지나다가 보고 물으며 말하기를, “거룩하옵니다. 척(惕)의 의(義)야말로. 선생은 대인이시니 장차 대인의 덕(德)에 나아가서 업을 닦으시려니와. 진항은 소인이오라 겸(謙)에서 취한 바 있사오니, 그 산은 높고 땅은 낮은데 마침내 굽히어 아래에 그쳤음을 위해서 이옵니다. 그래서 제 실(室, 거실)을 ‘겸겸(謙謙)’이라 이름하였으니 원컨대 선생은 가르침을 내려주소서.”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그럴상해도 이는 겸이 아니다. 네가 먼저 하나의 높은 의상(意想, 뜻과 생각)을 일으켜 놓고, 다시 하나의 낮은 형체를 마련하고..

[고전산문] 나라의 세 도적(三賊) / 심익운

나라에는 세 부류의 도적(盜賊)이 있다. 이는 곧 백성의 재앙이다. 나라에 세 부류의 도적이 횡행함은 나라가 잘못되어 있음을 알리는 표식이다. 임금된 이가 세 도적을 살펴서 제거하면 나라가 창성할 것이요, 세 도적이 제거되지 않고 그 무리의 영향력이 청산되지 않으면 나라가 필시 멸망할 것이다. 무엇을 일러 세 부류의 도적(盜賊)이라고 하는가? 재능과 역량(才力)은 벼슬을 맡기에 부족하고, 명예는 향당(鄕黨, 태어나고 자란 지방이나 마을)에 일컬어지기에 부족한데도, 한갓 일가 무리(種族)의 강성함과 가문의 재력과 세력(世家巨室)의 중함을 등에 업고 위엄을 부리고 기세를 올리며, 백성들을 약탈하고 착취해도, 고을을 다스리는 현령이 감히 힐난하지 못하고, 고을이 속한 지방 전체를 다스리는 방백(관찰사)이 감히..

[고전산문] 아는 만큼 보인다 / 유한준

그림은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 아끼는 사람, 보는 사람, 소장하는 사람이 있다. 중국 동진(東晉)의 고개지(顧愷之)의 그림을 부엌에 걸거나, 왕애(王涯)의 그림을 벽에다 꾸미는 것은 오직 소장한 것일 뿐, 단지 소장한 것만으로는 능히 그 그림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설령 본다 해도 어린애가 보는 것과 비슷하다. 그림을 보며 입을 벌리고 흐뭇해 하지만, 붉고 푸른 색깔 외에 다른 것은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능히 그 그림을 아끼고 사랑할 수가 없다. 설령 사랑하고 아낀다 해도 오직 붓과 종이의 색깔만 가지고 취하는 사람, 또는 그림의 형상과 배치만 가지고 구하는 사람은 능히 그 그림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다. 그림을 알아보는 사람은 외형이나 법도 같은 것은 잠시 접어두고, 먼저 오묘한 이치와 아득한 조..

[고전산문] 글을 짓는 방법 3가지 / 심익운

글(文)을 짓는 방법은 대략 세 가지가 있다. 도(道)와 법(法)과 신(神)이다. 도(道)는 본체며, 신(神)은 작용이고, 법(法)은 그 틀(器)이다. 이것을 사람의 몸에 비유하자면, 도(道)는 그 사람됨의 근본이다. 법(法)은 눈·코·입·귀·몸 등등처럼 바꿀수 없는 것이며, 신(神, 정신)은 그 지각운동의 영민함(정신활동, 즉 생각하고 느끼고 반응하는 일체의 정신활동)이다. 그러므로 도(道)로써 그 학문의 근본을 세우고, 법(法)으로써 그 바탕을 바르게 하며, 신(神)으로써 깨달음을 오묘하게 하는 것이다. 도(道)는 항상 주(主, 주인, 근본)가 되고, 법(法)과 신(神)은 서로 번갈아 그 뒤를 따르기에, 그로부터 기(奇, 독특함, 즉 독창성 혹은 창의성을 뜻함)와 정(正, 누구가 다 아는 원칙으로서의..

[고전산문] 중도(中道)는 일을 합당하게 처리하는 것 / 기대승

(상략) 근래에는 대소의 일에 대해 말하는 자가 있으면 과격하다고 하면서 중도(中道)를 얻어야 한다고 합니다. 아랫사람들이 어찌 중도(中道)를 배우고 싶지 않겠습니까마는 ‘중(中)’ 자는 가장 알기 어렵습니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똑같이 대해 주는 것이 중도가 아니고 선을 드러내고 악을 막는 것이 바로 중도(中道)입니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모두 거두어 함께 기르려고 하면 이것은 자막(子莫)의 집중(執中)*입니다. 도에 귀중한 것은 중도(中道)이고 중도에 귀중한 것은 권도(權道)입니다. 한 자 되는 나무를 가지고 말한다면 다섯 치가 중(中)이 되지만, 하나는 가볍고 하나는 무거운 물건을 가지고 말한다면 물건에 알맞은 것이 중도가 됩니다. 모든 일을 과격하게(냉정하고 엄격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고전산문] 비록 초라하게 살지라도 / 이가환

만약 현실에서 마주하는 '이것(是, 여기에선 '상황' '처지'를 특정하고 있음, '거시기')’을 능히 즐길 수 있다면, 비록 달팽이집처럼 작고 누추한 집에 살고, 새끼줄 띠를 두른 허름한 옷을 입고, 부스러기 쌀 하나 들어있지 않은 초라한 나물국을 먹더라도 모두 다 즐거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능히 ‘이것(是)’을 즐길 수 없다면, 무기고와 같은 넓은 터에 튼튼하게 벽을 쌓아 큰 집을 짓고,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날마다 온갖 맛있는 음식을 갖추어 먹는 부유하고 풍요로운 상황에 처할지라도 오히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부족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 집의 주인은 비록 두어 칸 밖에 안 되는 보잘 것 없는 집이라도 비바람을 가릴 수 있으면 족하고, 비록 삼베와 갈포로 만든 옷일지라도 추위와 더위를 막..

[고전산문] 역사서를 읽는 방법 / 이이

○ 《사기(史記), 여기선 역사의 기록, 즉 역사서를 말함, 이하 '역사서'로 대체》를 읽으면, 모름지기 치란(治亂)의 기틀과 현인 군자의 출처(出處)와 진퇴(進退)를 보아야 할 것이니, 이것이 곧 격물(格物, 사물의 이치와 도리를 헤아려 규명함)이다. 《정씨유서(程氏遺書)》 ○ 이천(伊川) 선생의 말씀이다. 정자가 말하기를, “대개 역사서를 읽을 때에는 한갓 사적(事迹)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그 치란(治亂)과 안위(安危)와 흥폐(興廢)와 존망(存亡)의 이치를 알아야 한다. 또 〈한고조 본기(漢高祖本紀)〉를 읽는다면 한나라 4백 년의 시종(始終)과 치란이 어떠하였던가를 알아야 할 것이니, 이것 역시 배우는 것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나는 역사서를 읽을 때마다 반쯤 읽으면 곧 책을 덮고 생각하..

[고전산문] 역사 인물의 평가 기준 / 기대승

대답하겠습니다. 천지 사이의 한 유생(儒生,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으로 만고의 일을 두루 살펴보매 한스럽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인의 자취를 상상하고 전현(前賢, 옛 현인)의 뜻을 추구하여, 높은 난간에 기대고 경침(警枕, 공처럼 둥글게 깍아 만든 나무 베게 )*에서 잠을 깨는 회포를 한번 시원하게 펴 보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집사 선생께서 시장(試場, 시험장)에 책문(策問)을 내시되 특히 "고인(옛 사람)의 은현(隱見, 드러나지 않은 것과 드러난 것)과 지업(志業, 뜻을 세워 그것을 이루고자 한 일)의 서로 다른 점"을 들어서 물으셨습니다. 어리석은 소생은 청하건대 그 밝게 물어 주신 질문 가운데 이른바 ‘마음가짐과 일을 행한 자취(處心行事之跡)’ 의 뜻을 통해 말씀드리겠습니다. ..

[고전산문] 오직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알 수 있는 것 / 이익

사광(師曠 춘추시대 진(晉)의 악사(樂師))이 진 평공(晉平公)에게,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해가 돋아오를 때의 햇빛 같고, 장성하여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해가 중천에 오를 때의 햇빛과 같으며, 늙어서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켜놓은 촛불의 빛과 같다.” 하였으니, 이 말은 무엇을 두고 한 말인가? 오직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알 수 있는 것이다. 학문이란 사색(思索)하는 것만 같은 것이 없고, 얻음이란 책만한 것이 없으니, 사색하여도 얻지 못하면 오직 책이 스승이 되는 것이다. 밤에 사색하여 얻지 못하였을 때에는 분ㆍ비(憤悱, 마땅히 표현을 어떻게 할 수 없어 고심하며 안타까워하고 한탄함 )하다가, 해가 돋은 뒤에 책을 대하면 그 즐거움이 어떠함을 알 수 있을 것이고, 낮에 얻지 못하였을 때에는..

[고전산문] 껍데기에서 나를 찾아 본들 / 박지원

영처자(嬰處子 이덕무(李德懋) )가 당(堂)을 짓고서 그 이름을 선귤당(蟬橘堂)이라고 하였다. 그의 벗 중에 한 사람이 이렇게 비웃었다. “그대는 왜 어지럽게도 호(號)가 많은가. 옛날에 열경(悅卿, 김시습)이 부처 앞에서 참회를 하고 불법을 닦겠다고 크게 맹세를 하면서 속명(俗名)을 버리고 법호(法號)를 따를 것을 원하니, 대사(大師)가 손뼉을 치고 웃으면서 열경더러 이렇게 말을 했네. ‘심하도다, 너의 미혹됨이여. 너는 아직도 이름을 좋아하는구나. 중(승려)이란 육체가 마른 나무와 같으니 목비구(木比丘)라 부르고 마음이 식은 재와 같으니 회두타(灰頭陀, 행각승)라 부르려무나. 산이 높고 물이 깊은 이곳에서 이름은 있어 어디에 쓰겠느냐. 너는 네 육체를 돌아보아라. 이름이 어디에 붙어 있느냐? 너에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