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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사람이 개만도 못한 점 / 성대중

사람이 짐승만 못한 점이 많다. 짐승은 교미하는 데 때를 가리지만 사람은 때를 가리지 않는다. 짐승은 같은 무리가 죽은 걸 보면 슬퍼하지만 사람은 남을 죽이고도 통쾌히 여기는 자가 있고, 간혹 남의 화를 요행으로 여겨 그 지위를 빼앗기도 하니 짐승이라면 이런 짓을 하겠는가. 화가 되돌아오는 것은 당연하다. 개는 사람이 뒷간에 올라가는 것을 보면 곧바로 몰려들어 사람이 대변보기를 기다렸다가 재빠른 놈은 먼저 달려들고 약한 놈은 움츠린다. 화가 나면 서로 물어뜯고 즐거우면 서로 핥아 대기도 하는데 다투는 것은 오직 먹이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고 누군들 추하게 여겨 비웃지 않겠는가. 그러나 사람이 밥그릇을 다투는 것도 개와 다를 바가 거의 없으니, 엄자릉(嚴子陵 엄광(嚴光))*이나 소 강절(邵康節)*이 살아..

[고전산문] 평생토록 독서를 한 이유 / 허목

노인이 재능과 지혜가 낮아 평생 독서를 하였는데, 책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부족함을 보충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또 세속의 글을 좋아하지 않고 삼대(三代) 때의 고문(古文)을 즐겨 읽었으나 끝내 소득은 없고 좋아하는 것만 여전하였다. 아래로 좌씨(左氏, 춘추좌씨전), 《국어(國語)》, 《전국장단서(戰國長短書)》, 선진(先秦) 시대의 책, 서한(西漢, 반고가 편찬한 전한의 역사를 서술한 역사서인 한서(漢書)), 태사공(太史公, 사마천), 상여(相如, 사마상여), 양웅(揚雄), 그리고 제자백가의 책들까지 두루 읽었으며, 또 그 아래로는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의 글이 가장 고문에 가까워서 60세가 되도록 1만 몇 천 번씩을 읽었다. 〈우서(虞書)〉와 〈하서(夏書)〉의 광대하고 시원스러운 글은 따라갈 수 없..

[고전산문] 좋은 문장은 흉내를 낸다고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최한기

경험과 추측으로 천인(天人)의 대도(大道)와 사물(事物)의 소도(小道)를 알았더라도 언어(言語)로써 표현(表現)하지 아니하면 다른 사람들이 어찌 들을 수 있으며, 문장으로 저술하지 아니하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옛 문장은 도(道)를 내포(內包)시켜 문사(文辭)를 이루고 바탕[質]을 말미암아 문채를 이루었는데, 중고(中古)의 문장은 남의 글귀를 주워모아 허영(虛影)을 얽고 고금을 종횡하며 정령(精靈, 본질적인 것, 즉 핵심)을 휘날리지만, 문채를 내려다가 도리어 덕(德)을 상실하고 혁신(革新)에만 치우쳐 실다움이 없게 되었다. 후세의 문장을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하늘의 문장과 땅의 문장과 인물의 문장에서 살아 움직이는 운화기(運化氣, 천하만물이 서로 반응하고 영향력을 주고 받으며 화합하고..

[고전산문] 본심을 잃었다는 것 / 맹자

우산(牛山)의 나무들도 예전에는 무성하여 아름다웠다. 그러나 대도시의 교외에 위치해 있어 사람들이 도끼와 자귀로 나무를 베어가니,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그 산에도 밤낮으로 만물을 생장시키는 원기와 촉촉이 적셔주는 비나 이슬이 있으므로 싹과 움이 트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나오는 족족, 소와 양이 뜯어 먹기 때문에 저렇게 민둥산이 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이 민둥산인 것만 보고 처음부터 재목이 있었던 적이 없다고 하는데, 이것이 어찌 산의 본성(本性)이겠는가. 사람이 지닌 본성에도 어찌 인의(仁義)의 마음이 없겠는가. 그런데도 그 양심(良心)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역시 도끼와 자귀로 산의 나무를 아침마다 베어가는 것처럼 스스로가 양심의 싹을 자르기 때문이니, 어떻게 아름답게 될 수 있..

[고전산문] 6가지 불치병 / 사마천

성인(聖人)은 병의 징후를 예견해 명의(名醫)로 하여금 일찍 치료하게 할 수 있다면 병도 나을 수 있고 몸도 살릴 수 있다. 사람이 걱정하는 것은 병이 많은 것이고 의원이 걱정하는 것은 치료방법이 적은 것이다. 이 때문에 여섯 가지 불치병이 있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 불치병은 교만해 도리를 논하지 않는 것이다. 두 번 째 불치병은 몸을 가벼이 여기고 재물을 중히 여기는 것이다. 세 번째 불치병은 의식(衣食)을 적절하게 조절하지 못한 것이다. 네 번째 불치병은 음(陰)과 양(陽)을 문란하게 하여 오장(五臟)의 기(氣)가 안정되지 못한 것이다. 다섯 번째 불치병은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약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여섯 번째 불치병은 무당의 말을 믿고 의원을 믿지 않는 것이다. 이 여섯 가지 불치병 중 하..

[고전산문] 도(道)에서 떠날 수 있으면 도(道)가 아니다 / 구양수

전일에 가신 뒤 다시 전에 주신 고문(古文)․금문(今文)으로 지은 잡문(雜文) 10여 편을 가지고 반복해 읽어보니, 〈大節賦 대절부〉․〈樂古 악고〉․〈太古曲 태고곡〉 등은 말이 더욱 높고 뜻이 극히 컸습니다. 족하(足下, 비슷한 연령대에서 자신을 낮추어 상대를 부르는 말)의 뜻을 찾아보건대 어찌 세상을 근심하고 시속(時俗)을 걱정하여 옛것을 궁구하여 도(道)를 밝혀서, 지금을 끌어다 옛날로 되돌려 오늘날의 분란하고 혼잡한 것들을 제거하고자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뒤에야 족하가 학문을 좋아하여 매우 뜻이 있는 분임을 더욱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태곳적 삼황(三皇)의 도(道)를 전술(傳述, 기술하여 전함)하여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취하여 말을 고원하게 하는 데 힘쓰고 현실성이 적으니, 이는..

[고전산문] 인( 仁) 또는 의(義)라는 이름이 성립하려면/ 정약용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이름은 일이 행위로 실천된 이후에 성립한다. 사람들을 사랑하는 행위가 있고 나서 비로소 그것을 인(仁)하다고 부를 수 있기때문이다. 사람을 사랑하기 이전에는 인(仁)이라는 이름이 성립되지 않는다. 나를 선하게 하고 나서 이를 행동으로 실천한 것을 두고 의롭다고 한다. 나를 선하게 하기 전에는 의(義)라는 이름이 성립하지 않는다. 주인과 손님이 서로 절하는 행동이 있고 나서 비로소 예(禮,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와 질서)라는 이름이 성립한다. 여러 현상과 사물에 대한 분별이 뚜렷하고 명확해진 다음에 지(智, 지혜 지)라는 이름이 성립한다. 이런즉, 마치 복숭아씨나 살구씨처럼 어떻게 인의예지라는 네 가지의 알맹이가 사람의 마음속에 이미 잠재하고 있다고 하겠는가? 안연이 공자에게 인..

[고전산문] 도(道)란 길을 가는 것과 같다 / 박지원

무릇 도(道)란 길과 같으니, 청컨대 길을 들어 비유해 보겠다. 동서남북 각처로 가는 나그네는 반드시 먼저 목적지까지 노정이 몇 리나 되고, 필요한 양식이 얼마나 되며, 거쳐가는 정자ㆍ나루ㆍ역참ㆍ봉후(烽堠, 봉화가 있는 보루, 즉 주요 거점)의 거리와 차례를 자세히 물어 눈으로 보듯 훤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 뒤에야 다리로 실지(實地, 실제하는 땅)를 밟고 평소의 발걸음으로 평탄한 길을 가는 법이다. 먼저 분명히 알고 있었으므로, 바르지 못한 샛길로 달려가거나 엉뚱한 갈림길에서 방황하게 되지 않으며, 또 지름길로 가다가 가시덤불을 만날 위험이나 중도에 포기해 버릴 걱정도 없게 되는 것이다. 이는 지(知, 앎)와 행(行, 실천)이 겸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행하면 저절로 알게 된다’고 ..

[고전산문] 마땅한 이유가 있어 통곡한다 / 허균

무릇 통곡(痛哭)에도 역시 도(道)가 있다. 대체로 사람의 칠정(七情) 중에서 쉽게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슬픔 만한 것이 없다. 슬픔이 일어나면 반드시 울음(哭)이 터져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한 슬픔이 일어나는 것 역시 그에 얽힌 사연 또한 복잡하고도 다양하다. 그런 까닭에, 가의(賈誼)는 세상사를 바르게 잡을 방도가 없어 크게 상심하여 통곡했다. 묵자(墨翟, 묵적)는 흰 실이 그 바탕 색을 잃은 것을 크게 슬퍼하여 통곡했다. 양주(楊朱)는 동서로 나뉜 갈림길을 싫어하여 슬피 울었으며, 완적(阮籍)은 가던 길이 가로 막혀 더 이상 갈 수 없음에 크게 울었다. 당구(唐衢)는 좋은 시대를 만나지 못하고 자신의 운명이 불우함을 슬퍼하여 스스로 자신을 세상 밖으로 내치고는, 크게 소리내어 울어 자신..

[고전산문] 악(惡)을 지극히 미워함 / 이익

공자(孔子)가 “악(惡)을 미워하기를 항백(巷伯)과 같이 해야 한다.*” 했는데 이는 지극히 미워한다는 말이니 본받을 만하다. 무릇 누구든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지만 모름지기 지공무사(至公無私 지극히 공정하여 사사로움이 없음)하게 한 다음이라야 참으로 옳고 그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항백)가 과연 참소를 만나 궁형(宮刑, 생식기를 제거당하는 신체 형벌)을 당한 사람이라면 혹 사사(개인적인 감정 혹은 원한)가 없지 않았을 것인데 군자(君子)가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취했을 것인가? 대개 시인(寺人, 임금 가까이서 일상의 수발을 드는 사람, 즉 환관, 내시)은 임금에게 친근한 때문에 무릇 위에서 받아들이는 것과 밑에서 하소연하는 것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 소인이 아첨하는 말로 하소연하여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