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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문장이 아닌 오직 그 사람을 볼 뿐이다

문장에는 아(雅)와 속(俗)이 없으니 오직 그 사람을 볼 뿐이다. 인품이 고고(高古)하면 그의 문장은 아(雅)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아(雅)해지고, 인품이 비하(卑下)하면 그의 문장이 비록 속(俗)을 벗어났다 할지라도 더욱 그 누추함만 드러낼 것이다. 고문(古文)에 뜻을 두었더라도 자가(自家, 자기)의 사람됨을 성취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또한 그의 문장을 성취함도 없을 것이니 노천(老泉은 당송팔대가인 소순 蘇洵의 호다)이 만년(晩年)에 스스로 수립(樹立)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노천은 「상여청주서(上余靑州書)」에서 ‘탈연(脫然)하게 남에게서 버림받고서는 버림받은 것이 슬프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분연(紛然)하게 남들에게 선택당해서는 선택당한 것이 즐겁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저절..

[고전산문]독노천문 (讀老泉文): 글은 억지로 지을 수는 없다

소순(蘇洵 1009~1060)의 글 중에 '중형문보자설(仲兄文甫字說)*'은 대개 바람과 물이 서로 만나는 자연의 이치를 빌려서 바람과 물이 자주 그 형상을 바꾸는 것을 묘사해 내었다. 이로써 소순은 자신의 문장이 살아 있는 것처럼 드러나는 오묘한 이치에 대해 설명하였다. 장공(長公, 소순의 맏아들, 소식蘇軾)의 이른바 ‘대략 떠가는 구름과 흘러가는 물 같아서 처음에는 정해진 성질(性質)이 없었는데 다만 그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마땅히 하였다.’ 라는 것과, 차공(次公, 소순의 둘째아들 소철蘇轍)의 이른바 ‘그 기운이 마음 속에 가득차서 외모에서 넘쳐나고, 그 말에서 움직여서 그 문장에 드러났지만 스스로는 알지 못했다’ 라는 것이 모두 이 글에 바탕을 둔 것이다. 무릇 글을 짓는데에는 부득이한 원인이 두 ..

[고전산문] 학문의 묘(妙)는 비우는데 있다

(유종원은) 하진사왕삼원실화서(賀進士王參元失火書)에서 삼원에게 축하하기를, ‘화재로 집이 검게 그슬려버리고 그 담장마저 불타버려 이제 당신이 재물을 가진게 없음이 분명해졌습니다. 이로 인하여 당신의 재능이 분명하게 드러나서 더렵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비로소 당신의 참 모습이 이제야 드러난 까닭입니다. 이는 축융(祝融 불의 신)이 그대를 도운 것입니다.’라고 했다. 내가 생각하기로, 이 말은 바로 자기가 문장을 익혔던 경험적 사실(事實)을 있는 그대로를 쓴 것이다. 재난을 당한 삼원을 오히려 축하한 것은 곧 자기를 위로하고 스스로 축하했던 경험에 근거한 까닭이다. 어째서인가? 유종원은 초년에 여러 서적들을 폭넓게 읽어 명성이 다양한 예술적인 방면에 널리 알려져 유명했다. 그래서 이미 그 마음에 쌓아 ..

[고전산문] 부모의 자식사랑에는 아들 딸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무릇 천지의 사이에 몸을 두고 있는 자라면 그 누구인들 자식이 되어 양친부모(兩親父母)가 남겨주신 몸을 계승한 자가 아니겠는가. 다만 기맥(氣脈)을 곧바로 전하여 종통(宗統 종가 맏아들의 혈통)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성(姓)을 따르고 어머니의 성은 따르지 않으며, 집안에 두 높은 분이 없기 때문에 상복(喪服)에 참최복(斬衰服 아버지 상에 입는 상복)과 자최복(齊衰服 어머니 상에 입는 상복)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생성(生成)하고 사랑하여 길러준 은혜에 있어서는 실로 어찌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간격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자식이 어머니에 있어 사랑하고 도와주는 마음이 일찍이 한결같지 않은 것이 아니며, 부모가 아들자식과 딸자식을 사랑하고 예쁘게 여기는 정이 일찍이 차이가 있지 않으니, 이..

[고전산문]비록 높은 재주와 아름다운 자질일지라도 절차탁마의 과정을 거쳐야

문집(文集 시나 문장을 모아 엮은 책)이 세상에 나오는 것은 고금(古今)을 통하여 모두 몇 가(家)에 불과한데 세상에 전하여 행해짐은 넓고 좁음과 오래고 가까움의 차이가 없지 못하다. 이것은 어찌 사람들의 좋아하는 것에 천심(淺深 얕음과 깊음)이 있고, 숭상하는 것에 경중(輕重, 가벼움과 무거움,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좋아하고 숭상함에 천심과 경중이 있는 것은 비단 그 문장의 기운에 높고 낮음이 있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 뜻에 정밀하고 거칢이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문장은 장구(章句)를 전공하는 자들도 흉내내어 만들 수가 있으나, 정미한 의리로 말하면 식견이 투철하고 조예(造詣)가 깊은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으니, 사람의 천성에서 우러나와 공공적(公共的)으로 취..

[고전산문] 인간세상은 거대한 물결이요, 인심은 거대한 바람이다

손(지나가는 사람)이 주옹(舟翁)에게 묻기를, “그대가 배에서 사는데, 고기를 잡으려니 낚시가 없고, 장사를 하려하니 재화(財貨)가 없고, 진리(津吏) 노릇을 하려해도 중류(中流)에서 머무르고 왕래하지 않는다. 일엽(一葉)의 편주(扁舟)를 헤아리지 못할 물에 띄워 만경(萬頃)의 가없는 곳을 넘다가 바람이 미친 듯이 불고 물결이 놀랜 듯이 밀려와 돛대가 기울고 노가 부러지면, 신혼(神魂)이 날아 흩어지고 몸이 전율에 싸여 생명이 지척 사이에 있게 되니, 지극히 험한 곳을 밟고 지극히 위태한 일을 무릅쓰는 일이로되, 그대는 도리어 이를 즐겨 길이 세상을 멀리하고 돌아오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주옹이 말하기를, “아, 손은 생각하지 못하였나. 사람의 마음이란 잡고 놓음이 일정함이 없어서, 평탄한 ..

[고전산문] 산골짜기에 흐르는 시냇물처럼

중 연사(然師)는 신인종(神印宗)의 시(詩)를 잘하는 스님이다. 그의 기상은 화목하고 마음은 담담하여, 공리(功利)와 명예의 마음을 버리고 선적(禪寂)*에 잠심하니, 당대 사대부들 중에 소중히 여기는 이가 많았다. 이제 ‘고간(古澗, 오래된 산골짝기의 물, 계곡의 물)’이라는 현판을 달고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나는 생각하기를, 사람의 천성이 선(善)한 것은 물의 본성이 맑은 것과 같은 것이다. 성품이 본래 선한 것이지만 악(惡)이 생기는 것은 욕심이 유혹하기 때문이며, 물의 본성은 본래 맑은 것이지만 흐리게 보이는 것은 오물이 더럽히기 때문이다. 그 악을 버리고 그 선을 보존시키면 인성(人性)은 그 처음대로 회복될 것이며, 그 흐린 것을 없애고 맑음을 나타내면 물의 본성은 그 정상을 되찾을 것이다. ..

[고전산문] 경설(驚說)

야밤에 우뢰소리를 듣고서 벌떡 일어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한평생 지은 죄악을 다 헤아리지 못하겠다. 그러다 또 생각이 떠올랐다. 충성하지 않고 효도하지 않고 우애하지 않고 공손하지 않고 간음이나 일삼고 남을 해치거나 하여, 하는 짓거리마다 하늘의 신(神)에게 죄를 얻을 인간들이 그 수(數)를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응당 와르르 쩌렁쩌렁 둥근 쇳덩어리 불덩어리가 쏟아져, 그따위 인간들을 그 자리에서 불태워 죽이는 사건이 발생해야 하건만 그런 일이 일어낫다는 소문은 끝내 듣지 못했다. 곰곰이 따져보니, 죄많은 인간들이 지상에 두루 차 있어 가려 뽑아낼 도리가 없는지라, 인간의 운명을 관장하는 신(神)이라 해도 처치할 방도가 없을 것이다. 그저 저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둔 채 지은 죄가 가득 차기를 기다렸다 ..

[고전산문] 묵은 견해를 씻어버려야 새로운 뜻이 온다

배우는 사람이 책을 볼 때 그저 앞으로 나아가려고만 하지, 물러서서 보려 하지 않는 데서 병통이 생긴다. 앞으로 나아가려 하거나 보아 얻으려 하면 할수록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게 되니, 한 걸음 물러서서 살펴보는 것만 못하다. 대개 병통은 집착하여 내려놓지 않는 데서 생긴다. 이는 마치 송사를 처리할 때, 마음이 먼저 을의 견해를 주장함이 있으면 문득 갑이 옳지 않은 점만 찾고, 먼저 갑의 의사를 주장함이 있으면 을의 잘못을 보려고만 드는 것과 꼭 같다. 잠시 갑과 을의 주장을 내려놓고 천천히 살펴야만 바야흐로 능히 그 옳고 그름을 따질 수가 있다. 장횡거(張橫渠)는 “묵은 견해를 씻어버려야 새로운 뜻이 온다”고 했다. 이 말이 참으로 옳다. 만약 묵은 견해를 씻어 버리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새로운 뜻을 얻..

[고전산문] 독서하는 방법(讀書法)

독서의 방법은 마땅히 차례에 따라 일정함이 있어야 한다. 한결같이 해서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구두와 문장의 의미 사이에 침잠해서, 붙들어 보존하고 실천하는 실지를 체험한 뒤라야 마음이 고요해지고 이치가 분명해져서 점차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널리 구하고 넓게 취해서 날마다 다섯 수레의 책을 외운다 해도 또한 배움에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정자(程子)가 말했다. “잘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가까운 데서부터 말(言)을 구한다. 가까운 것을 쉽게 보는 자는 말(言)을 아는 자가 아니다.” 이 말이 특별히 맛이 있다. 누가 물었다. “책을 읽어도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핵심을 어떻게 바로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근래에 배우는 자 가운데 어떤 부류는 책은 버려두고,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