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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문설(文說): 옛 것을 본받되 답습하지 않고 내 것을 이룬다

객(客)이 허자(許子)에게 물어왔다. “당세에서 고문(古文)에 능하다고 일컫는 자들은 반드시 그대를 최고로 친다. 내가 보기에는 그 글이 비록 넓고 커서 한량이 없는 것 같지만 대체로 상용(常用)의 말을 사용하여 글이 붙고 글자가 순탄하고, 그것을 읽으면 마치 입을 벌리고 목구멍을 보는 것과 같아서 해득하는 자나 해득하지 못하는 자를 막론하고 아무런 걸림이 없으니 고문을 전공하는 사람이 과연 이와 같은가?” 내가 대답하였다. “이런 것이 바로 고문이다. 그대는 우하(虞夏)의 전모(典謨)와 상(商)의 훈(訓)과 주(周)의 삼서(三誓)ㆍ무성(武成)ㆍ홍범(洪範) 등의 글을 보아라. 모두가 글로서는 극치이지만 여기에 장구(章句)에 갈고리를 달고 가시를 붙여 어려운 말로써 공교롭게 꾸민 곳이 있던가. 공자가 ‘문..

[고전산문]소인론(小人論)

요즈음 나라에는 소인(小人)도 없으니 또한 군자(君子)도 없다. 소인이 없다면 나라의 다행이지만 만약 군자가 없다면 어떻게 나라일 수 있겠는가? 절대로 그렇지는 않다. 군자가 없기 때문에 역시 소인도 없는 것이다. 만약 나라에 군자가 있다면 소인들이 그들의 형적(形迹)을 감히 숨기지 못한다. 대저 군자와 소인은 음(陰)과 양(陽), 낮과 밤 같아서 음(陰)이 있으면 반드시 양(陽)이 있고 낮이 있으면 반드시 밤이 있으니, 군자가 있다면 반드시 소인도 있다. 요ㆍ순 때에도 역시 그랬는데 하물며 뒷세상에서랴. 대개 군자라면 바르고 소인이라면 간사하며, 군자라면 옳고 소인이라면 그르며, 군자라면 공변되고 소인이라면 사심(私心)을 지녔으니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사정(邪正)ㆍ시비(是非)ㆍ공사(公私)의 판단으로써 ..

[고전산문] 품은 생각이 있어 운다

내 조카 친(親)이란 자가 자신의 서실(書室)을 짓고 편액을 통곡헌(慟哭軒)이라 달았다.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으며, “세상에 즐거울 일이 무척 많은데 어째서 통곡으로써 집의 편액을 삼는단 말이오? 하물며 통곡하는 이란 아버지를 여읜 자식이거나 아니면 곧 사랑하는 이를 잃은 부녀자인 것이며,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데, 그대만 혼자 사람들이 꺼리는 바를 범하여 거처에다 걸어 놓는 것은 어째서인가?”했다. 친은, “나는 시속의 기호를 위배한 자다. 시류가 기쁨을 즐기므로 나는 슬픔을 좋아하고, 세속사람들이 흔쾌해 하므로 나는 근심해 마지않는 것이다. 심지어 부귀와 영화에 있어서도 세상이 기뻐하는 바이지만, 나는 몸을 더럽히는 것인 양 여겨 내버리고, 오직 빈천하고 검약한 것을 본받아 이에 처하며,..

[고전산문]호민론 (豪民論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바는 오직 백성뿐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바는 오직 백성일 뿐이다. 홍수나 화재, 호랑이, 표범보다도 훨씬 더 백성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항상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먹음은 도대체 어떤 이유인가? 대저 이루어진 것만을 함께 즐거워하느라, 항상 눈앞의 일들에 얽매이고, 그냥 따라서 법이나 지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이란 항민(恒民)이다. 항민이란 두렵지 않다. 모질게 빼앗겨서, 살이 벗겨지고 뼈골이 부서지며(剝膚椎髓 박부추수), 집안의 수입과 땅의 소출을 다 바쳐서, 한없는 요구에 제공하느라 시름하고 탄식하면서 그들의 윗사람을 탓하는 사람들이란 원민(怨民)이다. 원민도 결코 두렵지 않다. 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 마음을 품고서, 천지간(天地間)을 흘겨보다가 혹시 시대적인 변고라도 있..

[고전산문] 학자라고 불리우는 거짓선비의 실체

옛날의 학문하는 사람이란 홀로 제 몸만을 착하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체로 이치를 궁구해서 천하의 변화에 대응하고, 도(道)를 밝혀서 뒤에 올 학문을 열어주어 천하 후세로 하여금 우리 학문은 높일 만하고, 도맥(道脈)이 자기를 힘입어 끊어지지 않았음을 환하게 알리려 하였다. 이렇게 하는 것을 유자(儒者)의 선무(先務, 우선시하는 의무)로 하였으니 그들의 마음씨는 역시 공변(한쪽으로만 치우치지않고 한결같은 공평함)되지 않은가? 근세(近世)의 학자라고 말해지는 사람이란 우리 학문을 높이기 위해서만이 아니며, 또한 홀로 제 몸만을 착하게 하려고도 않는다. 입으로 조잘대고 귀로 들은 것만을 주워 모아 겉으로 언동(言動)을 꾸미는 데에 지나지 않으나, 자신은, “나는 도(道)를 밝히오. 나는 이치를 궁구하오.”..

[고전산문] 독서 벽(癖)을 위한 규범

대저 사람이란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다 벽(僻)이 생기게 마련이요, 벽이 없으면 수고로움도 없게 마련이다. 예를 들면 산수(山水)에, 혹은 화목(花木)에, 혹은 구마(狗馬)나 환고(紈袴 귀족 자제의 의복)에, 혹은 사죽(絲竹 관현악(管絃樂))에, 혹은 술에, 혹은 차[茶]에 벽이 있어서 그 정(情)이 끌리게 되면, 마침내 은근히 주선하고 간곡히 포치(布置)하는 사이에 자기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필하여 교룡(蛟龍)이나 호표(虎豹)의 소굴에도, 풍정(風亭, 바람부는 곳)이나 노사(露榭, 이슬이 내리는 곳)에도 회피하지 않으면서 정신력을 소모하고 시청각(視聽覺)을 다하여 논(論)을 지어 칭송하는 한편, 좇아가고 싶어하고 또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한다. 이는 한때의 벽(癖)임에도 오히려 이러한데, 이것이 만약 ..

[고전산문] 책을 보는 것은 약을 복용하는 것과 같다

장횡거(張橫渠 송(宋) 장재(張載) 장자(長子)는 이렇게 말하였다. “책은 이 마음을 지켜 준다. 잠시라도 그것을 놓으면 그만큼 덕성(德性)이 풀어진다. 책을 읽으면 마음이 항상 있고, 책을 읽지 않으면 의리(義理)를 보아도 끝내 보이지 않는다.” 《장자전서(張子全書)》 안지추(顔之推 남북조 시대의 문신(文臣))는 말하였다. “재물 1천 만냥을 쌓아도 작은 기예(技藝, 갈고 닦은 기술과 재주) 한 가지를 몸에 지니는 것만 못하고, 기예 가운데 쉽게 익힐 수 있고 또 귀한 것은 독서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모두 면식(面識, 얼굴을 서로 알고 있음)이 많기를 바라고(서로 아는 사람 즉 인맥이 넓기를 바라고) 일을 널리 보려고 하면서도 독서를 하려 하지 않으니, 이는 배부르기를 구하면서 밥짓기를..

[고전산문]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이라면

혜강(嵇康)의 쇠붙이 다루기를 좋아한 것과 무자(武子, 왕제)의 말(馬)을 좋아한 것과 육우(陸羽 당 나라 사람)의 차(茶)를 좋아한 것과 미전(米顚)의 바위에게 절한 것과 예운림(倪雲林 원(元) 예찬(倪瓚)의 자호(自號))의 깨끗한 것을 좋아한 것은, 다 벽(癖)으로써 그 뇌락(磊落, 마음이 너그럽고 사사로운 일에 얽매이지 않음)ㆍ준일(雋逸 독특하고 뛰어남)한 기개를 보인 바이다. 내가 보건대, 세상에서 그 말이 맛이 없고 면목(面目)이 가증스러운 사람은 다 벽이 없는 무리들이다. 만약 진정 벽이 있다면 거기에 빠지고 도취되어 생사(生死)조차 돌아보지 않을 터인데, 어느 겨를에 돈과 벼슬의 노예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옛적에 화벽(花癖)이 있는 이는 어디에 기이한 꽃이 있다는 소문만 들으면 아무리 깊..

[고전산문]수창기(睡窓記): 잠자는 창

허자는 몹시 가난하여 튼튼하고 조용한 집이 없다. 대신에 골목에 초라하고 자그마한 집 한 채를 겨우 갖고 있다. 집은 사방이 한 길쯤 되는 넓이지만 허자는 겨우 칠 척 단신에 불과하므로 방에서 발을 뻗더라도 남는 공간이 있다. 이보다 넓어 비록 천만 칸이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더구나 창 안으로는 먼지가 들어오지 않고 서책이 죽 꽂혀 있어 마음은 즐겁고 기분은 쾌적하다. 창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모른다. 얼마나 상쾌한가!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한다. “창 밖에서 벌어지는 일은 허자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설사 안다 해도 그가 간여할 일이란 없다. 따라서 잠을 잔다는 핑계를 대고 창 안에 숨어서 ‘잠자는 창(睡窓)’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의 잠을 깨우는 사람으로는 오직 가끔 찾아..

[고전산문]금수거기(禽獸居記): 짐승보다 못한 사람

내가 금화(金化)에 살게 되면서 몇 칸짜리 집을 세내었다. 그 집에서 독서하며 지내던 중 맹자(孟子)가 진상(陳相)에게 말한 대목을 읽고서는 탄식의 말이 터져 나왔다. 정말이지 옛사람은 따라잡을 수가 없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며 편안하게 지내면서 교육을 받지 않는다면 짐승에 가깝게 될 것이다.”라고 맹자는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런 자라 해도 오히려 짐승보다 나은 점이 있을 것이다. 반면에 나는 조정에서 쫓겨나 떠돌면서 옷가지와 먹을거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으니 배부르고 등 따뜻하며 편안하게 지내는 자들과는 처지가 다르다. 옛 성인들의 책을 읽기도 했고, 오늘날의 군자들로부터는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승보다 못하니 ‘짐승에 가깝다’는 말을 어떻게 감히 쓸 수 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