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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옛사람은 문장을 지을 때 반드시 정성을 다하였다

구양공(歐陽公 송(宋) 나라 구양수(歐陽脩))이 만년(晚年)에 이르러 평생 동안 자기가 지은 글을 스스로 정리해 놓았으니, 지금의 이른바 《거사집(居士集)*》이라는 것이 그것인데, 왕왕 한 편의 글을 두고 몇십 번이나 읽으면서도 며칠이 지나도록 그 글을 문집 속에 수록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하지 못한 채 고민하기도 하였다. 또 백낙천(白樂天 낙천은 당(唐) 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자(字)임)의 시로 말하면 막힘이 없이 유창(流暢)하기만 하여 글을 다듬느라 고심(苦心)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뒤에 그 초본(抄本)을 얻어 보니 뜯어고친 흔적이 낭자하더라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결코 허술하게 넘기려 하지 않았던 옛사람의 문장에 대한 이러한 태도야말로 우리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일이 아..

[고전산문]시(詩)는 진실된 것이 우러나야

시(詩)는 하늘이 부여한 은밀한 장치(天機 천기)다. 시는 소리를 통해서 울리고 독특한 기운(色澤 색택)를 통해서 빛을 발한다. 맑고 탁한 것, 고상한 것과 속된 것이 시를 통해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다. 만약 시가 소리와 색택뿐이라면 사리에 어둡고 식견이 좁은 사람도 도연명의 운율을 가장할 수 있을 것이요 악착스러운 필부도 이태백의 구절을 모방할 수 있을 것이다. 운률을 가장하고 구절을 모방한다할지라도 있는 그대로 본래의 참 모습을 표현하는데에 지극한 공을 들이면 좋은 시가 된다. 하지만 그저 본뜬 것에 그치면 분수를 넘어선 잡스런 것이 되고 만다. 이는 무슨 까닭인가? 그속에 있는 그대로의 진실하고 올바른 것이 담겨있지 않기때문이다. 진실하고 올바른 것이란 무엇인가? 천기(天機, 하늘이 부여..

[고전산문]문채(文彩)의 중요성

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자들이 걸핏하면 ‘사달(辭達)*’을 구실로 삼곤 한다. ‘사달’이라는 말이 물론 성인께서 하신 말씀이긴 하다. 그러나 또 “말한 것이 문채가 나지 않으면 멀리 전해질 수 없다.(言之不文 行而不遠)”고 유독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대저 자신의 의사를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었다면, 이제 그 바탕을 마련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문채(文彩)**가 더 가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빈빈군자(彬彬君子)라고 일컬어지면서 후세에 불후(不朽)하게 전해질 수가 있겠는가. 이와 관련하여 한자(韓子, 한유(韓愈))는 말하기를 “오직 상투적으로 쓰는 진부한 말들을 제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唯陳言之務去)”라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예로부터 지금까지 글을 짓는 자들을 어찌 ..

[고전산문]무두지학(無頭之學): 머리없는 학문

덕(德)에 흉함도 있고 길함도 있다는 데 대한 변(辨) [德有凶有吉辨]월과(月課)로 지은 것 한자(韓子)의 원도(原道)에 이르기를, “도(道)와 덕(德)은 허위(虛位, 빈자리, 즉 뚜렷하게 정의됨이 없음)이다. 그러므로 도에는 군자의 도와 소인의 도가 있고, 덕은 흉덕(凶德)과 길덕(吉德)이 있다.” 고 하였는데, 내가 옳지 않다고 여겨 왔기에 이것을 변론해 보려고 한다. 덕은 얻는 것이니, 선(善)을 행하여 마음에 얻는 것을 덕(德)이라고 한다. 하늘이 뭇 백성을 낳았으니 물(物)이 있으면 법칙이 있다. 그러므로 일상생활 속에서 각각 마땅히 행하여야 할 도(道)가 있으니,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은 마땅히 얻어야 하는 것이다. 마땅히 얻어야 할 것을 얻는 것을 덕이라 하니, 얻어서는 안 되는 것을 얻는 ..

[고전산문] 술을 데우는 주로(酒鑪)를 보며

대저 주로(酒鑪, 술이나 물을 끓일 수 있는 화로)의 물건 됨됨이를 보건대 그 이치에 본받을 만한 것이 있고 그 공효(功效)상으로 폐(廢)하지 못할 점이 있다 하겠다. 이치상으로 본받을 만한 점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불이 쇠를 이길 수 있는데도 쇠가 오히려 불을 담고 있고, 물이 불을 끌 수 있는데도 불이 거꾸로 물을 끓이고 있으니, 이는 이들을 잘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세상을 경륜(經綸)할 때에도 강함과 부드러움을 함께 쓰면서 서로 피해를 받지 않게 하고, 강한 자와 약한 자를 동시에 구제하면서 서로 어긋나지 않게 하는 것이니, 이것 역시 대체로 볼 때 앞서 말한 방법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것이 바로 이치상으로 본받을 만한 점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공효상으로..

[고전산문] 글은 억지로 지을 수는 없다

소순(蘇洵 1009~1060)의 글 중에 '중형문보자설(仲兄文甫字說)*'은 대개 바람과 물이 서로 만나는 자연의 이치를 빌려서 바람과 물이 자주 그 형상을 바꾸는 것을 묘사해 내었다. 이로써 소순은 자신의 문장이 살아 있는 것처럼 드러나는 오묘한 이치에 대해 설명하였다. 장공(長公, 소순의 맏아들, 소식蘇軾)의 이른바 ‘대략 떠가는 구름과 흘러가는 물 같아서 처음에는 정해진 성질(性質)이 없었는데 다만 그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마땅히 하였다.’ 라는 것과, 차공(次公, 소순의 둘째아들 소철蘇轍)의 이른바 ‘그 기운이 마음 속에 가득차서 외모에서 넘쳐나고, 그 말에서 움직여서 그 문장에 드러났지만 스스로는 알지 못했다’ 라는 것이 모두 이 글에 바탕을 둔 것이다. 무릇 글을 짓는데에는 부득이한 원인이 두 ..

[고전산문] 문장이 아닌 오직 그 사람을 볼 뿐이다

문장에는 아(雅)와 속(俗)이 없으니 오직 그 사람을 볼 뿐이다. 인품이 고고(高古)하면 그의 문장은 아(雅)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아(雅)해지고, 인품이 비하(卑下)하면 그의 문장이 비록 속(俗)을 벗어났다 할지라도 더욱 그 누추함만 드러낼 것이다. 고문(古文)에 뜻을 두었더라도 자가(自家, 자기)의 사람됨을 성취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또한 그의 문장을 성취함도 없을 것이니 노천(老泉은 당송팔대가인 소순 蘇洵의 호다)이 만년(晩年)에 스스로 수립(樹立)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노천은 「상여청주서(上余靑州書)」에서 ‘탈연(脫然)하게 남에게서 버림받고서는 버림받은 것이 슬프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분연(紛然)하게 남들에게 선택당해서는 선택당한 것이 즐겁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저절..

[고전산문] 학문의 묘(妙)는 비우는데 있다

(유종원은) 하진사왕삼원실화서(賀進士王參元失火書)에서 삼원에게 축하하기를, ‘화재로 집이 검게 그슬려버리고 그 담장마저 불타버려 이제 당신이 재물을 가진게 없음이 분명해졌습니다. 이로 인하여 당신의 재능이 분명하게 드러나서 더렵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비로소 당신의 참 모습이 이제야 드러난 까닭입니다. 이는 축융(祝融 불의 신)이 그대를 도운 것입니다.’라고 했다. 내가 생각하기로, 이 말은 바로 자기가 문장을 익혔던 경험적 사실(事實)을 있는 그대로를 쓴 것이다. 재난을 당한 삼원을 오히려 축하한 것은 곧 자기를 위로하고 스스로 축하했던 경험에 근거한 까닭이다. 어째서인가? 유종원은 초년에 여러 서적들을 폭넓게 읽어 명성이 다양한 예술적인 방면에 널리 알려져 유명했다. 그래서 이미 그 마음에 쌓아 ..

[고전산문] 분고지(焚稿識): 글쓴 원고를 태우다

후세의 군자는 진실로 저술에 능하지 못하다. 비록 능하다 하더라도 무엇을 저술할 것인가. 말할 만한 것은 옛사람이 다 말하였고 그 말하지 않은 것은 감히 말하지 못하는 법이니 저술을 일삼을 수 없는 것이다. 일찍이 선유(先儒)의 술작(述作, 글을 지어 책을 만듦)을 보건대, 세교(世敎, 세상의 가르침)를 부축할 경우에 글을 썼고 뭇사람의 미혹을 분별할 때 썼으며, 성인의 뜻을 발휘하거나 사관의 궐문(闕文, 문장 중에서 빠진 글자나 글귀)을 보충할 경우에 글을 써서 이 몇 가지 경우가 아니면 쓰지 않았다.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 지은 저술들이 또한 행해져서 학문이 한 시대에 뛰어나고 재주가 뭇사람의 지혜를 겸하지 않음이 없지만, 필생동안 노력하여 천 마디를 삭제하..

[고전산문] 묘리를 깨닫는 것은 필묵으로 표현하는 것 밖에 있는 것

자첨(子瞻, 소식(蘇軾))이 대나무 그리는 것을 논하면서 “먼저 가슴속에 대나무가 이루어진 다음에 붓을 들어 곧장 완성해야 하니 조금만 방심하면 그 대나무는 사라지고 만다.”라고 하였다. 그것은 도(道)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다. 신묘하게 마음에 부합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빨리 글을 써야 하니, 이것이 《회흔영(會欣穎)》을 지은 까닭이다. 문장은 깨달음을 위주로 하여 말이 제대로 전달되면 이치가 드러나니, 어떨 때는 오래 음미하여 깨닫게 되고 어떨 때는 갑자기 깨닫게 되는데 오직 묘리를 깨닫는 것은 필묵으로 표현하는 것 밖에 있는 것이다. 저 《이아(爾雅)》에 나오는 곤충과 물고기에 주(註)를 달고 굴원의《이소(離騷)》에 나오는 향초(香草)나 주워 모으는 자라면 어찌 더불어 이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