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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극(七克): 욕심이 곧 악은 아니다

《칠극》*은 서양(西洋) 사람 방적아(龐迪我)의 저술로 곧 우리 유교(儒敎)의 극기(克己)*의 논설과 같다. 그 말에 “인생(人生)의 백 가지 일은 악(惡)을 사르고 선(善)을 쌓는 두 가지 일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므로, 성현의 훈계는 모두 악을 사르고 선을 쌓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무릇 악이 욕심에서 생겨나기는 하나 욕심이 곧 악은 아니다. 이 몸을 보호하고 영신(靈神)을 도와주는 것이 바로 욕인데, 사람이 오직 사욕에만 빠지므로 비로소 허물이 생겨나고 여러 가지 악이 뿌리박는 것이다. 이 악의 뿌리가 마음속에 도사려, 부(富)하고자 하고, 귀하고자 하며, 일락(逸樂)하고자 하는 이 세 가지의 큰 줄기가 밖에 나타나고 줄기에서 또 가지가 생겨, 부하고자 하면 탐심(貪心)이 생기고, 귀하고자 하면 오..

불치하문(不耻下問)

문(文)이란 도(道)가 붙여 있는 것이다. 위에서 나타나는 일월(日月)과 성신(星辰)은 천문(天文), 밑에서 나타나는 산천과 초목은 지문(地文), 이 천지 사이에서 나타나는 예악형정(禮樂刑政)과 의장도수(儀章度數)는 인문(人文)이라 하는데, 《주역》에 “인문을 보아 천하를 잘 되도록 한다.”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성인(聖人)은 여러 가지의 절도를 꼭 이치에 맞도록 하여 천하를 바른 길로 통솔하는 까닭에 “글로 가르친다[文敎].”고 했는데, 이는 문왕(文王)이 그렇게 했던 것이다. 공자(孔子)가 지위는 얻지 못했어도 오히려 목탁(木鐸)이 되어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가르친 결과, 도(道)가 다 없어지지 않는다는 희망을 가졌기에 “문(文)이 여기에 있지 않느냐?[文不在茲乎]”고 하였으나 그 생각만은 역시 슬프..

육정 육사(六正六邪): 6가지 바른 것과 사악한 것

사마공(司馬公)의 간원제명기(諫院題名記)*는 읽고 경각심을 일으킬 만하다 하겠다. 그러나 ☞고려 김심언(金審言)의 말이 더욱 절당(切當, 사리에 꼭 들어맞음)한 것만은 못하다. 심언(審言)은 성종(成宗) 9년(990)에 《설원(說苑)》에 있는 육정(六正)ㆍ육사(六邪)라는 말을 인증하여 이경(二京)과 육관(六官)의 모든 기관, 또 12도(道)의 주현(州縣)의 각 관청 벽에다 그 글을 써서 붙이고 출입할 때마다 보고 반성하도록 하였다. 육정(六正)이란 무엇이냐 하면, 조짐이 나타나기 전에 혼자서 흥망의 기미를 미리 알아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예방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고귀한 자리에서 편히 앉아 있도록 해야 하니, 이와 같이 하는 자는 성신(聖臣)이요, 마음을 텅 비우고 뜻을 미리 정해서 착한 도리로 진언하여..

복선화음(福善禍淫)

하늘과 땅이 교합하여 태괘(泰卦, 땅이 아래에 있고 하늘이 아래에 위치한 주역 64괘중의 하나, '상호 소통하는 어우러짐과 대동의 조화'를 의미함)가 되매 군자의 도(道)는 자라나고 소인의 도는 사라지니, 이는 성왕(聖王)의 세대에 사람이 하늘과 땅에 참여하여 삼재(三才, 하늘, 땅, 사람)가 된다는 것이다. 천도(天道)는 운행하고 지도(地道)는 생양(生養, 낳고 키우고 기름)하나 천지의 변화 생육(變化生育)을 돕는 것은 사람에게 있으므로 천지는 자연에 속하고, 과한 것은 억제하고 모자라는 것은 도와서 이루도록 하는 것은 사람이다. 소와 말에 비유하건대, 다리가 넷이 있음은 천지의 조화요, 코를 뚫고 머리에 굴레를 씌우는 것은 사람의 공력이다. 그러나 다만 재량(裁量, 스스로 판단하여 처리함)하여 이루게..

학문은 반드시 의심을 가져야 한다

(상략) 살펴보건대, 양(梁)나라 간문제(簡文帝)의 〈사칙뢰중용강소계(謝勅賚中庸講疏啓)〉를 보면 “천지의 으뜸이 되는 법으로, 나가서는 충성하고 들어와서는 효도하는 도는 실로 가르침을 확립하는 관건이요, 덕행의 목표이다. 천년 전에 성인이 큰 교훈을 받들지 않았다면 구경(九經)의 질서를 알고 두 학문의 극치를 얻지 못하였을 것이니, 아아, 위대하도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양나라 황실의 부자는 배우기를 좋아했으나 실천이 없어서 마침내 나라가 망하게 되었으니, 그들은 좋아하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은 자일 것이다. 어찌 이런 세상에 뛰어난 식견을 가지고도 자기 한 몸을 처신하지 못하여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이 또한 학자들이 크게 경계해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알맞은 사람이 아니면 말해도 도움이 ..

거짓된 도학자(道學者)는 되지 말아야

(상략)족하(안정복, 자는 백순, 순암)께서는 학문의 방향에 대해 필시 평소 명확한 주관이 있을 터인데, 무슨 까닭으로 귀머거리와 같은 저의 견해를 이토록 열심히 빌리고자 하십니까? 이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있으면서도 없는 듯이 하고 꽉 찼으면서도 텅 빈 듯이하여, 학식이 적고 유능하지 못한 자에게 더욱 힘써 묻는 것일 뿐입니다. 제가 듣건대, 만약 스스로 발전하고자 한다면 한마디의 가르침으로도 충분하다고 합니다. 머리를 곧게 세우는 것(頭容直)과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不妄語)*은 어린아이들도 익히고 외는 말인데, 다른 사람을 통해 이 말을 듣고 깨달아 분발하여 평생 덕업(德業)의 문로(門路)로 삼았던 저분들이 애초에 이 구절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뜻이 지향하게 되자 기(氣)가 따르게 ..

유구독서(有求讀書): 마음의 양식이 안되는 독서

구하는 바가 있어 글을 읽는 자는 아무리 읽어도 소득이 없다. 그러므로 거자업(擧子業 과거를 위해 하는 공부)을 하는 자는 입술이 썩고 치아가 문드러질 지경에 이르러도 읽기를 멈추기만 하면 캄캄하므로 마치 소경이 희고 검은 것을 말하면서도 그 희고 검은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그 말하는 바가 귀로 들어와서 입으로 나오는 것에 불과하므로 마치 배가 터지도록 먹고 도로 토해내면 신체(肌膚)에 이익됨이 없을 뿐 아니라 지기(志氣)도 괴려(乖戾, 이치에 어그러져 온당치 않음)하게 되는 것과 같다. 배우는 도(道)는 스승을 엄하게 대하는 것이 어렵다. 스승이 엄해진 뒤에 도가 높아지고 도가 높아진 뒤에 경학(敬學)을 알게 되므로 태학(太學)의 예(禮)에 비록 천자에게 가르치더라도 북면(北面)하는 일이 없..

독서사환(讀書仕宦): 물욕이 마음에 걸려 있는 까닭에

어려서 배움은 커서 행하려는 것인데 글 읽는 것만 같은 것이 없다. 성현의 글을 읽고 의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다소의 견득(이치를 이해하고 깨달아 얻음)이 없겠는가? 그러나 예부터 현달하여 벼슬한 자로서, 평생에 배운 바를 그대로 시행한 자가 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 일을 실시할 때에 말할 때와 같게 못하고 또 남의 마음이 자기의 마음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위엄과 지체에 억눌리는 바가 되고, 혹은 여럿에게 꾀이기도 하며, 혹은 시세(時勢)의 협박도 받게 되고(이해관계에 연연하여 세상 눈치보기, 자기검열 등), 혹은 이욕의 구렁에 빠지기도 했으니, 이는 모두 욕심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물욕이 양심을 이김에 따라 양심이 옮겨지고, 양심이 옮겨짐에 따라 일이 제대로 되..

선악부정(善惡不定): 악하고 바르지 못한 품성에 대하여

공자가, “상지(上智, 보통사람보다 지혜가 매우 뛰어남 또는 그런 사람)와 하우(下愚, 아주 어리석고 못남 또는 그런 사람)는 옮겨지지 않는다(唯上知與下愚 不移 유상지여하우 불이, 즉 '오직 선천적으로 매우 지혜로운 사람과 매우 어리석은 사람은 서로 바뀔 수 없다.' /논어 양화편).” 하였으니, 이 두 가지 품(品) 이외는 모두 옮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옮긴이 주: 상지와 하우는 논어 계씨편에 나오는 다음의 문장과 연결지어보면 이해가 좀 더 쉬워지겠다. “공자 왈, 나면서부터 이치를 아는 사람이 상등(上等)이고, 배워서 안 사람이 그 다음이고,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배운 사람이 또 그 다음이니, 힘들다고 배우지 않는 그 사람이 바로 최하등의 사람이다.”) 매양 사람을 시험해 보면 중인(中人)의 성품은..

직언극간(直言極諫): 곧은 말로 극진히 간한다

사람의 언론은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말하는 것인데, 옳은 것을 옳다고 하면 듣는 자가 기뻐하고 말하는 자도 기분이 좋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즐겨 말하거니와,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하면 듣는 자가 흔히 기뻐하지 않고 말한 자에게 해가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옳은 것을 옳다고 하는 논설은 반드시 아첨하는 데로 돌아가게 되니, 그른 것을 그르다고 말하여서 바로 잡기를 바라는 것만 같지 못하다. 옳은 것을 옳다고 하여 기쁘게 하는 것도 사람을 그르칠까 두려운데 하물며 그른 것을 옳다고 칭찬할 수야 있겠는가? 개인 사이에도 그러한데, 하물며 조정((朝廷, 임금이 나라의 정치를 신하들과 의논하거나 집행하는 곳. 또는 그런 기구)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무릇 여러 나라를 살펴보건대, 옳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