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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소인배(小人輩)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남의 힘을 빌려야만 일어설 수 있는 자는 어린아이이고, 남에게 빌붙어서 자라는 것은 담쟁이덩굴이고, 남이 하는 대로 따라서 변하는 것은 *영(影, 그림자)과 망량(魍魎, 사람이나 동물의 모습을 한 귀신, 또는 사물에 깃든 혼령, 즉 실체가 없는 껍데기)이고, 남의 물건을 훔쳐서 자기를 이롭게 하는 자는 좀도둑이고, 남을 해쳐서 자기를 살찌우는 자는 시랑(豺狼, 승냥이와 이리)이다. 사람이 혹시라도 이 다섯 가지 범주에 근접하게 되면, 군자(君子)에게서 버림을 받고 소인(小人)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데 아래의 두 가지는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범죄 행위이니 그래도 쉽게 면할 수 있다 하겠지만, 위의 세 가지는 눈에 잘 안 보이는 허물이니 살피기가 더더욱 어렵다 하겠다. 그러니 자신의 행실을 닦아 나가는 ..

[고전산문] 문장을 모르는 자와 문장을 말할 수 없다

문장의 좋고 나쁨은 원래 정해진 바탕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긴 하지만 문장이라는 것이 워낙 정미(精微)하고 변화가 많은 것인 만큼, 반드시 이에 능통한 다음에야 그 문장의 수준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니, 그러한 경지에 이르지도 않고서 문장의 묘한 솜씨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장을 모르는 자의 입장에서는 그럴 듯한 돌멩이를 가리켜 옥(玉)이라 하고 정아(正雅)한 것을 비속(鄙俗, 천하고 저질스럼)하다고 하더라도 분간할 길이 없지만, 아는 자의 입장에서 보면 마치 저울로 무게를 달고 잣대로 길이를 재듯 하기 때문에 아무리 속여먹으려 해도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것이다. *태백(太白 이백(李白))과 같은 고명한 재질의 소유자도 문득 최호(崔顥)에게 스스로 머리를 숙였으..

[고전산문] 분수를 알고 마음을 지키는 사람

이장 대재(李丈 大載)씨가 면천(沔川)에서 나의 해장정사(海莊精舍)에 들러 담소하다가 청하기를, “내가 면천에서 객지 생활을 한 뒤로 일찍이 개밋둑이나 달팽이 껍질 같은 집이라도 나 하나 살 만하고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이제 와서야 안간힘을 쓴 끝에 비로소 겨우 들어가 살 만한 소옥(小屋)을 갖게 되어 건조하고 습기찬 것과 춥고 더운 것을 피할 수 있게끔 되었다. 이 집이 비좁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긴 하나 나의 거처로는 안성맞춤이라서 내 입장에서는 대궐 이상으로 느껴지기만 한다. 내가 일찍이 통인(通人 박람다식(博覽多識)한 인물) 권여장(權汝章 권필(權韠))의 말을 들어 보건대 ‘나의 밭을 갈아 먹고 나의 샘을 파서 마시며 내 천명을 지키면서 내 생애를 마치련..

[고전산문] 옛사람은 문장을 지을 때 반드시 정성을 다하였다

구양공(歐陽公 송(宋) 나라 구양수(歐陽脩))이 만년(晚年)에 이르러 평생 동안 자기가 지은 글을 스스로 정리해 놓았으니, 지금의 이른바 《거사집(居士集)*》이라는 것이 그것인데, 왕왕 한 편의 글을 두고 몇십 번이나 읽으면서도 며칠이 지나도록 그 글을 문집 속에 수록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하지 못한 채 고민하기도 하였다. 또 백낙천(白樂天 낙천은 당(唐) 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자(字)임)의 시로 말하면 막힘이 없이 유창(流暢)하기만 하여 글을 다듬느라 고심(苦心)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뒤에 그 초본(抄本)을 얻어 보니 뜯어고친 흔적이 낭자하더라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결코 허술하게 넘기려 하지 않았던 옛사람의 문장에 대한 이러한 태도야말로 우리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일이 아..

[고전산문]시(詩)는 진실된 것이 우러나야

시(詩)는 하늘이 부여한 은밀한 장치(天機 천기)다. 시는 소리를 통해서 울리고 독특한 기운(色澤 색택)를 통해서 빛을 발한다. 맑고 탁한 것, 고상한 것과 속된 것이 시를 통해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다. 만약 시가 소리와 색택뿐이라면 사리에 어둡고 식견이 좁은 사람도 도연명의 운율을 가장할 수 있을 것이요 악착스러운 필부도 이태백의 구절을 모방할 수 있을 것이다. 운률을 가장하고 구절을 모방한다할지라도 있는 그대로 본래의 참 모습을 표현하는데에 지극한 공을 들이면 좋은 시가 된다. 하지만 그저 본뜬 것에 그치면 분수를 넘어선 잡스런 것이 되고 만다. 이는 무슨 까닭인가? 그속에 있는 그대로의 진실하고 올바른 것이 담겨있지 않기때문이다. 진실하고 올바른 것이란 무엇인가? 천기(天機, 하늘이 부여..

[고전산문]문채(文彩)의 중요성

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자들이 걸핏하면 ‘사달(辭達)*’을 구실로 삼곤 한다. ‘사달’이라는 말이 물론 성인께서 하신 말씀이긴 하다. 그러나 또 “말한 것이 문채가 나지 않으면 멀리 전해질 수 없다.(言之不文 行而不遠)”고 유독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대저 자신의 의사를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었다면, 이제 그 바탕을 마련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문채(文彩)**가 더 가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빈빈군자(彬彬君子)라고 일컬어지면서 후세에 불후(不朽)하게 전해질 수가 있겠는가. 이와 관련하여 한자(韓子, 한유(韓愈))는 말하기를 “오직 상투적으로 쓰는 진부한 말들을 제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唯陳言之務去)”라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예로부터 지금까지 글을 짓는 자들을 어찌 ..

[고전산문]무두지학(無頭之學): 머리없는 학문

덕(德)에 흉함도 있고 길함도 있다는 데 대한 변(辨) [德有凶有吉辨]월과(月課)로 지은 것 한자(韓子)의 원도(原道)에 이르기를, “도(道)와 덕(德)은 허위(虛位, 빈자리, 즉 뚜렷하게 정의됨이 없음)이다. 그러므로 도에는 군자의 도와 소인의 도가 있고, 덕은 흉덕(凶德)과 길덕(吉德)이 있다.” 고 하였는데, 내가 옳지 않다고 여겨 왔기에 이것을 변론해 보려고 한다. 덕은 얻는 것이니, 선(善)을 행하여 마음에 얻는 것을 덕(德)이라고 한다. 하늘이 뭇 백성을 낳았으니 물(物)이 있으면 법칙이 있다. 그러므로 일상생활 속에서 각각 마땅히 행하여야 할 도(道)가 있으니,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은 마땅히 얻어야 하는 것이다. 마땅히 얻어야 할 것을 얻는 것을 덕이라 하니, 얻어서는 안 되는 것을 얻는 ..

[고전산문] 술을 데우는 주로(酒鑪)를 보며

대저 주로(酒鑪, 술이나 물을 끓일 수 있는 화로)의 물건 됨됨이를 보건대 그 이치에 본받을 만한 것이 있고 그 공효(功效)상으로 폐(廢)하지 못할 점이 있다 하겠다. 이치상으로 본받을 만한 점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불이 쇠를 이길 수 있는데도 쇠가 오히려 불을 담고 있고, 물이 불을 끌 수 있는데도 불이 거꾸로 물을 끓이고 있으니, 이는 이들을 잘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세상을 경륜(經綸)할 때에도 강함과 부드러움을 함께 쓰면서 서로 피해를 받지 않게 하고, 강한 자와 약한 자를 동시에 구제하면서 서로 어긋나지 않게 하는 것이니, 이것 역시 대체로 볼 때 앞서 말한 방법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것이 바로 이치상으로 본받을 만한 점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공효상으로..

[고전산문] 글은 억지로 지을 수는 없다

소순(蘇洵 1009~1060)의 글 중에 '중형문보자설(仲兄文甫字說)*'은 대개 바람과 물이 서로 만나는 자연의 이치를 빌려서 바람과 물이 자주 그 형상을 바꾸는 것을 묘사해 내었다. 이로써 소순은 자신의 문장이 살아 있는 것처럼 드러나는 오묘한 이치에 대해 설명하였다. 장공(長公, 소순의 맏아들, 소식蘇軾)의 이른바 ‘대략 떠가는 구름과 흘러가는 물 같아서 처음에는 정해진 성질(性質)이 없었는데 다만 그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마땅히 하였다.’ 라는 것과, 차공(次公, 소순의 둘째아들 소철蘇轍)의 이른바 ‘그 기운이 마음 속에 가득차서 외모에서 넘쳐나고, 그 말에서 움직여서 그 문장에 드러났지만 스스로는 알지 못했다’ 라는 것이 모두 이 글에 바탕을 둔 것이다. 무릇 글을 짓는데에는 부득이한 원인이 두 ..

[고전산문] 문장이 아닌 오직 그 사람을 볼 뿐이다

문장에는 아(雅)와 속(俗)이 없으니 오직 그 사람을 볼 뿐이다. 인품이 고고(高古)하면 그의 문장은 아(雅)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아(雅)해지고, 인품이 비하(卑下)하면 그의 문장이 비록 속(俗)을 벗어났다 할지라도 더욱 그 누추함만 드러낼 것이다. 고문(古文)에 뜻을 두었더라도 자가(自家, 자기)의 사람됨을 성취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또한 그의 문장을 성취함도 없을 것이니 노천(老泉은 당송팔대가인 소순 蘇洵의 호다)이 만년(晩年)에 스스로 수립(樹立)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노천은 「상여청주서(上余靑州書)」에서 ‘탈연(脫然)하게 남에게서 버림받고서는 버림받은 것이 슬프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분연(紛然)하게 남들에게 선택당해서는 선택당한 것이 즐겁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저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