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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학문의 묘(妙)는 비우는데 있다

(유종원은) 하진사왕삼원실화서(賀進士王參元失火書)에서 삼원에게 축하하기를, ‘화재로 집이 검게 그슬려버리고 그 담장마저 불타버려 이제 당신이 재물을 가진게 없음이 분명해졌습니다. 이로 인하여 당신의 재능이 분명하게 드러나서 더렵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비로소 당신의 참 모습이 이제야 드러난 까닭입니다. 이는 축융(祝融 불의 신)이 그대를 도운 것입니다.’라고 했다. 내가 생각하기로, 이 말은 바로 자기가 문장을 익혔던 경험적 사실(事實)을 있는 그대로를 쓴 것이다. 재난을 당한 삼원을 오히려 축하한 것은 곧 자기를 위로하고 스스로 축하했던 경험에 근거한 까닭이다. 어째서인가? 유종원은 초년에 여러 서적들을 폭넓게 읽어 명성이 다양한 예술적인 방면에 널리 알려져 유명했다. 그래서 이미 그 마음에 쌓아 ..

[고전산문] 분고지(焚稿識): 글쓴 원고를 태우다

후세의 군자는 진실로 저술에 능하지 못하다. 비록 능하다 하더라도 무엇을 저술할 것인가. 말할 만한 것은 옛사람이 다 말하였고 그 말하지 않은 것은 감히 말하지 못하는 법이니 저술을 일삼을 수 없는 것이다. 일찍이 선유(先儒)의 술작(述作, 글을 지어 책을 만듦)을 보건대, 세교(世敎, 세상의 가르침)를 부축할 경우에 글을 썼고 뭇사람의 미혹을 분별할 때 썼으며, 성인의 뜻을 발휘하거나 사관의 궐문(闕文, 문장 중에서 빠진 글자나 글귀)을 보충할 경우에 글을 써서 이 몇 가지 경우가 아니면 쓰지 않았다.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 지은 저술들이 또한 행해져서 학문이 한 시대에 뛰어나고 재주가 뭇사람의 지혜를 겸하지 않음이 없지만, 필생동안 노력하여 천 마디를 삭제하..

[고전산문] 묘리를 깨닫는 것은 필묵으로 표현하는 것 밖에 있는 것

자첨(子瞻, 소식(蘇軾))이 대나무 그리는 것을 논하면서 “먼저 가슴속에 대나무가 이루어진 다음에 붓을 들어 곧장 완성해야 하니 조금만 방심하면 그 대나무는 사라지고 만다.”라고 하였다. 그것은 도(道)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다. 신묘하게 마음에 부합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빨리 글을 써야 하니, 이것이 《회흔영(會欣穎)》을 지은 까닭이다. 문장은 깨달음을 위주로 하여 말이 제대로 전달되면 이치가 드러나니, 어떨 때는 오래 음미하여 깨닫게 되고 어떨 때는 갑자기 깨닫게 되는데 오직 묘리를 깨닫는 것은 필묵으로 표현하는 것 밖에 있는 것이다. 저 《이아(爾雅)》에 나오는 곤충과 물고기에 주(註)를 달고 굴원의《이소(離騷)》에 나오는 향초(香草)나 주워 모으는 자라면 어찌 더불어 이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

[고전산문] 예가 아닌 것에 귀를 막는다

귀가 맡은 것은 듣는 일로, 들을 때는 밝게 들을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로써 오사(五事, 모습, 말, 봄, 들음, 생각함)*에 통달하고 만 가지 변화에 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밝게 듣는 것이 지나치면 때때로 덕을 해치고 마음에 병이 되니, 지나치게 번거로우면 어지럽고, 들리는 것이 패악하면 번뇌가 쌓인다. 들을 때는 치우치지도 않고 잡박하지 않아서 오직 선(善)을 택해야 하니, 이것을 일러 “덕을 밝히고 어긋난 것을 막는다.”라고 하는 것이다. 때문에 국군(국왕 國王)은 주광(黈纊)*의 장식이 있고 가옹(家翁, 집주인)은 치롱(癡聾, 어리석고 귀먹은 사람)의 풍송(諷誦)*이 있으며 군승(郡丞)같은 미관(微官, 보잘것 없는 직책의 벼슬자리)에 이르러도 하상(何傷)의 설*이 있으니, 귀가 먹음은 진실로 수..

[고전산문]오직 마음으로 거울을 삼을 뿐

눈이 남은 보지만 자신을 보진 못하니 밝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의 의관이 바르지 못하면 자기가 그것을 보지만, 자기가 자신의 의관을 바르게 하고자 하면 반드시 거울로 비추어 보아야 하니, 거울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돌이켜 보게끔 한다. 지금 저 방에 등불을 밝히면 불빛이 반드시 새어나오지만 방안에 있는 사람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나와서 밖에서 보아야만 드러나니, 보는 것에 현혹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는 일에는 착한 것도 있고 착하지 못한 것도 있는데 그것은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라다니듯 드러난다. 오늘 한 가지 일을 행하면 내일 사방의 이웃들이 그것을 알게 되고, 또 그 다음날은 온 나라 사람이 알게 되고, 천하가 알게 되고 만세토록 알게 되기에 이른다. 그런데도 자기만 스스로 알지 못..

[고전산문]지난 날을 애석해 함 (惜往日)

젊은 시절에는 내일이 많았고늙어버린 지금에는 어제가 많아지는구나 내일이 모두 다 어제가 되어버리니오늘이란 어쩌면 그저 찰나와도 같은 것만고 세월이 하나같이 이처럼 쌓여가고거침없이 흘러가니 어느 때에나 그칠거나황하의 물은 거꾸로 흐르지 않고 밝은 해는 서쪽에서 뜨지 않는데 먼저 깨닫고 일찍 아는 것도 마찬가지라덕과 학문을 닦는 방법도 오직 하나의 방도만은 아닐터통달한 사람은 세상에 업적을 이루고뛰어난 학자는 저술에 힘쓰는데 외연을 수양하는게 마침내 무슨 보탬이 될까거리낌 없는 말과 행동도 실질은 없는 법하늘이 내게 참된 마음 주었는데어찌하여 스스로 방종하게 내버려두었는가지금 거울 속에 보이는 수천 가닥의 흰 머리칼은아침 나절엔 검은 칠한 것처럼 보였는데애석한 마음 탄식하며 일어나 서성대니한 밤중의 귀뚜라미..

[고전산문] 서파삼우설(西坡三友說)

서파삼우(西坡三友)란 나의 벗 이이립(李而立)이 스스로 지은 별호이다. 이립은 사람들 중에서 호걸이다. 소년에 육적(六籍, 육경, 즉 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기, 악경)에 통하여 우리 유학에 명성을 독차지 하였고, 을유년 과거에 급제하여 대간(臺諫)을 역임하고 인물을 전형하는 직임을 맡아 10년을 벼슬길에 있으면서 공로와 이름이 현저하니, 하늘이 낸 재능이라 이를만 하다. 기해년 가을에 벼슬에서 물러나 남방으로 돌아와 영천(永川)의 서파리(西坡里)에 살면서 스스로 호하기를 서파삼우(西坡三友)라 하니, 세 벗이란 양수(陽燧, 구리로 만든 불꽃을 지피는 도구)와 뿔 술잔과 쇠칼이다. 그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벗과 떨어져 혼자서 사니, 사람들이 나에게 벗을 구하려하지도 않고, 나도 굳이 사람들에게 ..

[고전산문] 사람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

옛날 한(漢)나라의 적공(翟公)이 정위 벼슬을 그만두자, 찾아오는 손님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 뒤에 다시 벼슬을 하자 손님들이 다시 찾아오려 하였다. 이에 적공은 그의 집 대문에 이렇게 크게 써 붙였다.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어 보아야만(一死一生일사일생) 사귀던 정을 알 수가 있고(乃知交情 내지교정), 한 번 가난해졌다 한 번 부해져 보아야만(一貧一富 일빈일부) 사귀던 실태를 알 수가 있고(乃知交態 내지교태), 한번 귀한 자리에 있었다가 한 번 천한 신분이 되어보아야(一貴一賤 일귀일천) 사귀던 정이 드러나게 된다(交情乃見교정내현).” 세상에서는 이것을 이야기거리로 삼았었다. 그러나 나는 일찍이 적공의 사람됨을 천박하게 보았다. 이런 까닭에 적공을 찾았던 손님들도 하나같이 비루하고 용렬하기는 하나 적공이 ..

[고전산문]술을 마시다(飮酒)

我不如陶生 나는 도연명보다 못해서世事纏綿之 세상 살아가는 일에 늘 얽매여 있네云何得一適 어떻게 한번이라도 훌훌 털어내고亦有如生時 도연명처럼 살 수 있을까村田無荊棘 한 뙈기의 밭이라도 잡초가 없다면佳處正在玆 그곳이 바로 좋은 곳從心與事往 마음을 따라서 세상 일을 하며 살아도所遇無得疑 마주치는 것마다 더 이상 의심치 않을 것을.偶得酒中趣 가끔은 술 마시는 즐거움이라도 있어空杯亦常持 빈 술잔이나마 들고 다닌다네 -소식(蘇軾) 漢詩, '술을 마시다(飮酒)', 全文*『蘇東坡詩集권35 '和陶飮酒二十首'』

[고전산문] 바보를 파는 아이(賣癡獃)

거리에서 아이들이 외치고 다니면서 팔고 싶은 물건이 하나 있다고 한다. 무엇을 팔려느냐 물어보았다. "끈덕지게 붙어 다녀 괴롭기만한 바보를 팔겠다"고 한다. 늙은이가 말하기를, "내가 사련다. 그 값도 당장에 치뤄 줌세. 인생살이에 지혜는 내 그리 바라지 않는다. 지혜란 원래 시름만 안길 뿐이다. 온갖 걱정거리 만들어 내 평정심을 깨뜨리고, 온갖 재주 다 부려 약삭빠른 이해타산에나 쓰일 따름이다. 예로부터 꾀주머니로 소문난 이들의 처세는 어찌 그리도 야박하고 구차했던가. 환하게 빛나는 기름 등불을 보라. 자신을 태워 스스로 없애지 않는가. 짐승도 그럴 듯한 문채가 있으면 끝내 덫에 걸려 죽고야 만다. 그러니 지혜란 없는 게 낫다. 더우기 바보가 된다면 더욱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네게서 바보를 사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