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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도둑질 하는 자

절도나 강도가 어찌 빈궁한 사람 중에만 있겠는가? 부귀한 사람 중에도 있다. 가난한 사람은 굶주리다 못하여 밤중에 남의 집에 구멍을 뚫고 들어가 곡식이나 돈을 훔치다가 인기척을 들으면 깜짝 놀라 얼른 피신한다. 그러나 부귀한 사람은 탐욕에 빠진 나머지 위세(威勢)를 빙자해서 선량한 사람을 능멸해 대낮에 수많은 재물을 강탈한다. 그 정상(情狀, 있는 그대로의 사정과 형편)을 논할 것 같으면, 가난해서 남의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오히려 불쌍한 생각이 들지만, 부귀한 사람의 강탈은 엄한 벌로 다스려야 할 것이나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온 나라 백성들의 마음에는 이런 자를 엄한 벌로 다스리기를 바라는데, 이것을 어찌 얼굴만 보고 다 알 수 있겠는가? 또 세상을 속여 이름을 도둑질하는 자..

[고전산문] 허위의 학문은 세상의 어리석은 자를 속일 뿐

실제 일로 세상을 속인다면 사람들이 다 믿지 않지만, 허위(虛僞)의 일로 세상을 속이면 아는 자는 믿지 않더라도 모르는 자는 믿으니, 성실의 학문은 세상을 속일 수 없으나 허위의 학문은 세상의 어리석은 자를 속일 뿐이다. 깜깜하게 어두워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혼자만 안다고 하고, 황홀하여 준칙(準則)이 없는 것을 헛된 즐거움으로 삼으면, 사세가(일이나 형편, 상황을 헤아리는데 있어서) 반드시 옛사람을 인용(引用)하여 방금 사람의 일은(현재의 사람이 처한 상황이나 형편은) 살피지 않고, 말마다 반드시 옛글을 일컬어(들먹이고 판단하여) 방금의 운화(세상의 다양한 상황들과 요소와 변수들이 현재의 일에 상호 간섭하고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는 것)를 알지 못한다. 스스로 옛사람에게 속임을 당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마..

[고전산문] 부귀와 빈천

부귀를 높이고 빈천을 낮추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보편적인 마음이다. 부귀를 싫어하고 빈천을 즐기는 것은 궁핍하고 가난한 선비가 마음에 가진 뜻을 지키고자 굳세게 다 잡은데서 나오는 격한 감정을 짐작하게 하는 말이다. 보통 사람이면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마음을 선비의 말에 견주어보면, 전자든 후자든 치우치고 막힌 도량을 각각의 마음으로 깨달은 이치라고 스스로 믿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어찌 천하 만물 인생사의 섭리가 끊임없이 상호 순환하며 서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전체적으로 헤아려 보는 것만 하겠는가? 인생의 부귀 빈천은 때에 따라 옮겨지므로, 부귀가 빈천으로 바뀌는 수도 있고 빈천이 갑자기 부귀에 오르는 수도 있으니, 눈앞에 당한 높이거나 낮추는 것은 실로 잠시의 일인데 하필..

[고전산문] ‘귀먹을 농(聾)’ 이란 글자에 담긴 뜻

무릇 ‘농(聾, 귀먹을 농)’이란 한 글자를 사람들은 모두 병으로 여긴다. 그러나 나만은 홀로 아름답게 여기니 어째서인가? 귀가 먹으면 사람들에게 비록 선악과 시비가 있더라도, 나는 들은 게 없는 까닭에 다른 사람에게 말로 전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비록 장단과 득실이 있더라도, 들은 게 없는 까닭에 다른 사람에게 말로 전하지 않는다. 남의 악담과 패욕이 저절로 내 몸에 미치지 못하니, 내 몸은 이 때문에 저절로 편안해지고, 마음도 이 때문에 저절로 바르게 된다. 그래서 거처하는 곳마다, 이르는 곳마다 모두 합당하기 마련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남에게 모욕을 당하는 일도 내 입으로 말미암아 당하는 것이요, 남에게 실패를 당하는 일도 내 혀로 인해 당하는 것이다. ‘농’이란 한 글자를 굳게 지키고 잃..

학문의 방법은 자기에게서 돌이켜 구하는 것일 뿐

맹자가 말했다. “학문의 방법은 다른 것이 없다. 자기에게서 돌이켜 구하는 것일 뿐이다.” 오늘 한 마디를 읽으면 반드시 이와 같이 하고, 내일 한 사람을 보면 반드시 이처럼 한다. 또 이튿날 한 가지 일을 들으면 꼭 그렇게 한다. 읽은 책이 나날이 더 많아지고 세상에서 듣고 본 것이 날로 더욱 넓어지면 고금과 천하의 좋은 점이 모두 내게 갖추어져서, 고금과 천하의 악함은 터럭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될 것이다. 옛날에 위기지학(爲己之學), 즉 '자기를 위한 학문'이라고 일컬었던 것은 이 방법을 따르는 것일 뿐이다. 성인이 거룩하게 된 까닭은 이것을 모았기 때문일 뿐이다. 군자는 배움에 있어 힘 쏟지 않는 곳이 없다. 하지만 반드시 중점을 두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거두는 보..

본 바가 적으면 괴상한 것이 많다

계서(季緖) 유협((劉勰, 465년~521년, 중국 남조시대 양나라의 문학자, 최초의 문학비평서라 할수 있는 문학이론과 평론의 고전 '문심조룡'의 저자)은 작가의 반열에 들지도 못했으면서 남의 글 헐뜯기를 좋아하여 당세 거공들의 비웃는 바가 되었다. 대저 다른 사람의 글을 망령되이 헐뜯어서는 안 된다. 그 편장과 체제, 자구와 색상이 갑자기 내 안목을 놀래키는 것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쉽게 평을 내려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이 읽은 책을 내가 다 읽은 것이 아니고, 내가 읽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이 다 읽지 않은 것도 아니다. 저 사람이 비록 명성이 낮고 배움이 부족하더라도 간혹 어쩌다 내가 미처 살피지 못한 것을 알 수도 있거늘 하물며 박식하기가 나보다 나은 사람일 경우이겠는가? 인품의 높고 낮음과 문사..

재주는 부지런함만 못하고 부지런함은 깨달음만 못하다

사람이 아이 적에 책을 두세 번만 읽고도 곧바로 외우거나, 또 간혹 7, 8세에 능히 시문을 지어 입만 열면 그때마다 남들을 놀라게 하다가도 정작 나이가 들어서는 성취한 바가 남보다 특별히 나은 점이 없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똘똘한 재주가 쉬지 않는 부지런함만 못함을 알게 되었다. 또 불을 밝혀 새벽까지 쉬지 않고 애를 쓰다가 흰머리가 흩날릴 지경이 되었는데도 스스로 일가의 말을 이루지 못하는 자가 있으니 그 까닭은 어째서일까? 겨우 백여 권의 책을 읽고도 붓을 내려 종이에 폄에 쟁그랑 소리를 내며 환히 빛나, 만 권을 외운 자가 뒤에서 눈이 휘둥그레지기도 한다. 똑같이 한 권의 책을 읽고 한 사람은 한 글자도 남김없이 외웠는데도 식견은 늘지 않고 저작에 볼 만한 것이 없으며, 한 사람은 반 넘어 잊어..

덕이 없어 깨닫지 못하는 것도 있다

지금 사람들은 문학과 사공(事功, 일의 업적, 공적)과 기술 등의 방면에서 남을 헐뜯어 비웃지 않으면, 자기가 익히던 것을 버리고 좋아 보이는 것으로 옮겨가곤 한다. 둘 다 잘못이다. 자기에게서는 좋은 것을 가려서 굳게 지키고, 남에게서는 장점을 취해 아울러 받아들이니, 이를 일러 군자라 한다. 세상에 기뻐할 만한 사람이 많으면 이는 내 덕이 날로 진보하는 것이고 천하에 미워할 사람이 많으면 이는 내 덕이 날로 줄어드는 것이다. 이것은 소식(蘇軾, 소동파)의 「강설剛說」에 나오는 격언이다. 내가 일찍이 스스로 내 마음에 시험해보았지만, 끝내 절실하게 깨닫지는 못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다른 사람의 글을 보면 점점 인정함이 많아지고 배척함이 줄어드는 것을 느낀다. 어찌 내 문장의 경지가 거칠게나마 예전보..

책을 제대로 읽은 사람은 누구인가

두 사람이 똑같이《논어》 한 권을 다 읽었다고 하자. 한 사람은《논어》 전체를 마치 자기 말처럼 전부 외운다. 하지만 막상 어떤 상황에 닥쳐서는 생각과 그 헤아림이 책이 가르치는 바에 미치지 못한다. 그 행동하는 바를 살펴봐도 마찬가지다. 읽은 것과 반대로 행동한다.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한 두 장도 제대로 외우지 못한다. 하지만 화나는 일이 생기면, 곧 바로 《논어》에서 읽었던 한 구절을 생각한다. 그래서 말하기를, "《논어》 중에 한 구절이 있다. 그 말을 일일히 다 기억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화가 날 때 제멋대로 행동하면 뒤에 반드시 어려움이 있다'는 그런 의미의 말이었다"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깊이 반성하여 마침내 화를 참고 분노심을 가라앉혔다. 뜻하지 않는 재물과 마주해서도 마..

섣부른 평가, 조급한 결론

오늘날의 사람들은 사람을 논하고 사건을 논함에 정해진 견해라고는 없고 대부분 성질이 조급하다. 이런 까닭에 오늘은 이처럼 이렇게 이야기하고 내일은 또 저렇게 이야기하면서, 어제 이야기한 것과 어긋난다는 사실을 전혀 생각지 않는 자도 있다. 어떤 사건의 시비도 시일이 경과하고 여론이 모아지면서 모두 같아진다. 이렇게 되면 조급한 자가 아니더라도 일세의 공론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다음 날부터 처음에는 다른 의견이 들려오고, 곧 이어서 거기에 맞장구치는 자가 생긴다. 그러면 며칠 안 지나 시비가 반반이 된다. 그러니 몇 년 뒤엔 정론이 필경 어느 쪽에 속하게 될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맹자께서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어질다고 하거나 모두 불가하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살펴야한다’는 교훈을 남기신 까닭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