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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문설(好問說): 의심나면 묻는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것보다 더 나은 앎이란 없지만, 여기서 안다는 것은 이치에 국한한다. 사물의 명칭이나 수치와 같은 것은 반드시 묻기를 기다린 뒤에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순(舜)임금은 묻기를 좋아했으며 공자는 예(禮)에 관해서 묻고 관직에 대해서 물었으니. 하물며 이보다 못한 사람에 있어서이랴! 내가 일찌기 《본초(本草)》를 읽은 후에 들판을 다니다가 부드럽고 살진 줄기와 잎을 가진 풀을 보고 그것을 캐고 싶어 시골 아낙네에게 물었다. 아낙네가, "이것은 '초오(草烏, 투구꽃)'라고 하는데 지독한 독이 있답니다"라고 하기에 깜짝 놀라 버리고 갔다. 본초를 읽기는 했지만 풀의 독에 거의 중독될 뻔하다가 물어서 겨우 면하게 된 것이니, 천하의 일을 자세히 따져 묻지 않고 망령되이 어찌 단정할 수 있겠는..

부끄러움을 부끄러워 하는 사람

세상의 군자(君子)들을 보니 잘난 체하고 남을 업신여기며, 제멋대로 행동하고 큰소리 치는 사람이 많았다. 유독 권언후(權彦厚)군은 무언가 결여되어 부족한 듯하고, 뒤로 빼서 무능해 보여 그 낯빛에 부끄러움이 있는 것 같았다.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머뭇거리다가 한참 후에 말했다. "저는 천지(天地, 하늘과 땅)를 대하기가 부끄럽습니다. 천지는 일찍이 수많은 성현(聖賢)들을 살게 해주었는데, 지금은 저를 살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해와 달을 보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해와 달은 일찍이 수많은 성현들을 비추어 주었는데 지금 저를 비추어 주기 때문입니다. 또 저는 음식과 거처를 옛 사람과 같이 하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잡고 발로 가는 것을 옛 사람과 같이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같지 않는 것이 있으..

진짜와 가짜

호랑이는 깊은 산속에 살아서 사람들이 쉽게 보기 어렵다. 옛날 책에서 대개 말하기를 “호랑이의 씩씩하고 괴이함이 악귀와도 같다”고 했고, 여러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보면 건장하고 걸출한 사나운 호랑이의 모습만 부각시킨다. 나는 ‘세상에 어떻게 이처럼 울부짖는 기이한 동물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생각했다. 신유년(혜환 34세 때) 광주(廣州)에서는 사나운 호랑이 때문에 골치를 앓아 관에서 호랑이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을 모집하여 상을 주었다. 사냥꾼 아무개가 연거푸 호랑이 여러 마리를 죽이자, 형님인 죽파공(竹坡公,이광휴)이 그 소식을 듣고는 후한 값을 치르고 황화방(皇華坊,현재의 정동井洞) 집으로 가져오게 했다. 죽은 호랑이를 몇 리도 채 옮기기 전에 거리는 이미 인파로 가득차서 뿌연 먼지가 천지를 뒤덮..

어쩔 수 없으니 쓴다

이 글을 어찌하여 백운(白雲筆)이라 이름하였는가? 백운사(白雲舍)에서 썻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백운사에서 썼는가? 어쩔 수 없어 쓴 것이다. 어찌하여 어쩔 수 없이 썼다고 하는가?백운은 원래 궁벽한 곳인데다 여름 날은 지루하기만하다. 궁벽하므로 사람이 없고, 지루하니 할 일이 없다. 일도 없고 사람도 없으니, 어찌해야 이 궁벽한 곳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겠는가?나는 돌아다니고 싶지만 갈만한 곳도 없고 등에 내리쬐는 뜨거운 볕이 두려워 나갈 수가 없다. 나는 자고 싶지만, 멀리서는 발(簾, 주렴)을 흔드는 바람이 불어오고 지척에서는 풀냄새가 진동하니 크게는 입이 비뚤어지거나 작게는 학질에라도 걸릴까봐 두려워 누울 수가 없다. 나는 글을 읽고 싶지만, 몇줄만 읽어도 이내 혀가 마르고 목구멍이 아파 억..

토하는 것은 진실로 취한 사람의 일상사

나는 반유룡의 '시여취'(詩餘醉)를 얻어서 그것을 읽고 또 읽고는, 다시 모아 그것을 기록했다. 때로는 그 곡조를 흉내내기도 하고 운자(韻字)를 따라 거기에 화답하기도 했다. 꽃이 피기 시작할 때 시작해서 꽃이 질 때 쓰기를 마쳤는데, 내가 얻은 것은 이 또한 몇 편 있어 그것을 한 권의 작은 책으로 베끼고는 '묵토향'(墨吐香)이라 이름을 붙였다. 누군가 그 뜻을 물어 오기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시여(詩餘)는 사(詞)이지 술이 아니다. 그런데 인장(麟長)은 그것을 취(醉)라 이름하였으니, 글이 사람의 내장을 적시고 사람의 정신과 영혼을 흥겹게 하는 것이 마치 술이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자가 그 누구인들 취하지 않겠는가? 나도 이 글을 읽고 진실로 취하고 말았다. 크게..

이언(俚諺) : 천지만물이 나를 통해 표현된다

천지만물은 천지만물의 성(性, 본질, 특성)이 있고, 천지만물의 상(象, 모습 형태)이 있고, 천지만물의 색(色)이 있고, 천지만물의 성(聲, 소리)이 있다. 총괄하여 살펴보면 천지만물은 하나의 천지만물이고, 나누어 말하면 천지만물은 각각의 천지만물이다. 바람 부는 숲에 떨어진 꽃은 비오는 모양처럼 어지럽게 흐트러져 쌓여 있는데, 이를 변별하여 살펴보면 붉은 꽃은 붉고 흰 꽃은 희다. 그리고 균천광악(勻天廣樂)이 우레처럼 웅장하게 울리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현악(絃樂)은 현악이고 관악(管樂)은 관악이다. 각각 자기의 색을 그 색으로 하고, 각각 자기의 음을 그 음으로 한다. 한 부의 온전한 시(詩)가 자연 가운데에 원고로 나와 있는데, 이는 팔괘(八卦)를 그어 서계(書契)를 만들기 전에 이미 갖추어진 것..

책에 취하다

나는 책을 좋아하고 또 술을 즐긴다. 그렇지만 거처하는 곳이 벽지이고 올해는 흉년이 들어 돈을 빌려서 술을 살 수는 없다. 바야흐로 따듯한 봄기운이 사람을 취하게 만들므로 그저 아무도 없고 어떤 집기도 없는 방안에서 술도 없이 혼자 취할 따름이다. 어떤 이가 내게 술단지속에 시여취(詩餘醉)란 책 한질을 넣어 선물 하였는데, 그 내용은 곧 화간집(花間集)과 초당시여(草堂詩餘)였고 편집한 사람은 명나라 인장(鱗長) 반수(潘叟, 반유룡 潘游龍)였다. 기이 하여라! 먹을 누룩으로 하여 빚은 술이 결코 아니고, 서책은 술통과 단지가 결코 아니거늘, 이 책이 어찌 나를 취하게 할 수 있으랴? 그 종이로 장독이라도 덮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읽기를 사흘이나 계속 하였더니 눈에서..

오직 진실된 것이라야

(상략)대저 천지만물에 대한 관찰은 사람을 관찰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사람에 대한 관찰은 정(情)을 살펴보는 것보다 더 묘한 것이 없고, 정(情)에 대한 관찰은 남녀의 정(情)을 살펴보는 것보다 더 진실한 것이 없다. 이 세상이 있으매 이 몸이 있고, 이 몸이 있으매 이 일이 있고, 이 일이 있으매 곧 이 정(情)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관찰하여 그 마음의 사정(邪正, 그릇됨과 올바름을 아울러 이르는 말)을 알 수 있고, 그 사람의 현부(賢否,어질고 사리에 밝은 것과 그렇지 못한 것)를 알 수 있고, 그 땅의 후박(厚薄, 인심과 정이두터운 것과 모멸차고 야박한 것)을 알 수 있고, 그 집안의 흥쇠(興衰, 흥망성쇠,흥하고 망함)를 알 수 있고, 그 나라의 치란(治亂, 잘 다스려지는 세상과 어지럽..

노자를 읽고(讀老子): 물에 대하여

일찌기 듣건대, 공자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한다. "노자는 용이다. 훌륭하구나, 그모습이여! 용은 위로는 하늘에 있고, 아래로는 못에 있다. 그 자취는 신묘하고, 그 작용은 두루 거대하니, 항아리 속의 물고기가 아니로다." 내 경우에는 다만 그 물을 보았을 뿐 용을 보지 못했다. 크도다, 물이여! 물은 하지 않음도 없고 주장함도 없고, 부러워함도 없고 업신여김도 없지만, 천지의 장부(臟腑, 오장육부)요, 만물의 젖줄이다. 물은 한가롭고 여유롭게 흘러가지만, 요리사가 물을 취해, 매실을 넣으면 신맛이, 꿀을 넣으면 단맛이, 산초를 넣으면 매운 맛이, 소금을 넣으면 짠 맛이 나서 다섯 가지 맛의 장이 된다. 물은 아무 맛이 없지만, 결국 맛을 내는 것은 물이다. 염색공이 물을 취해 섞으면 치자에서는 ..

칠야(七夜): 일곱 가지 밤

어느 날 밤, 내가 등잔 기름이 다 닳은 뒤에 잠이 들었는데 실컷 자고 깨어 보니 아직 캄캄하더라고. 그래서 심부름하는 아이한테 물었지.“밤이 얼마나 됐느냐?” “아직 자정이 안 됐습니다.” 그래서 또다시 잠이 들었어. 실컷 자고 깨어나서 또 아이한테 물었지. “밤이 얼마나 됐느냐?” “아직 닭 울 때가 안 됐습니다.그래서 또다시 억지로 잠을 청했지마는 잠이 와야 말이지. 몸을 뒤척뒤척하다가 일어나서 또 아이한테 물었어. “밤이 얼마나 됐느냐? 방 안이 환한 걸 보니 날이 샌 게지.” “아니, 아직 날이 새지 않았습니다. 방 안이 환한 것은 달빛이 지게문에 비쳐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소리쳤어. “아이고 참. 겨울밤이 길기도 하구나!” 그랬더니 아이가 뭐랬는지 알아? “무슨 밤이 길다고 그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