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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알량한 모이와 한 국자 물로는 그 주림과 목마름을 적실 수 없다

작년 기해년(1659, 효종10) 10월에 이교(李矯)가 하얀 학 한 마리를 데려왔다. 11월에는 이지형(李之馨)이 또 하얀 학 한 마리를 데려왔는데, 둥근 목덜미와 기다란 다리는 앞서 온 녀석만 못했지만, 붉은 정수리를 내렸다 올렸다 하면서 꾸국꾸국 맑은 울음소리로 때를 알리고, 길들이는 데도 시일이 얼마 걸리지 않아 박자에 맞춰 빙빙 돌며 춤을 추었으니, 이 점은 앞서 온 녀석보다 오히려 나았다. 정원지기는 나중에 온 녀석을 ‘작은 학’이라 불렀는데, 성질이 매우 유약하여 좁쌀 알갱이를 주면 늘 큰 놈에게 빼앗기곤 했다. 그러나 새장에서 풀어주고부터는 마음대로 다니면서 물을 마시고 모이를 쪼았다. 금년이 되어 때로는 날아서 앞의 시냇물까지 내려가고 때로는 산 위로 날아오르기도 했는데, 아침저녁으로 밥..

[고전산문] 남을 사랑하라고 권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묵자가 말한다.“어진 사람의 하는 일은 반드시 천하의 이익을 일으키고 천하의 해를 제거하기를 힘써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시대에 있어서 세상의 해(害)는 무엇이 가장 큰가? 그것은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공격하는 것과 큰 집안이 작은 집안을 어지럽히는 것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위협하는 것과 많은 사람들이 적은 사람들에게 횡포한 짓을 하는 것과 사기꾼이 어리석은 사람을 속이는 것과 귀한 사람이 천한 사람에게 오만한 것과 같은 것이니, 이것이 세상의 해(害)인 것이다."(중략) 잠시 시험삼아 이러한 여러 해들이 생겨나는 근본을 캐어 본다면 이것은 어디에서 생겨나고 있을까? 이것들은 남을 사랑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데서 부터 생겨나는 것일까? 그러면 반드시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고 할 것이다. 반드시 말..

[고전산문] 안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지각이란 바탕이 되는 것이다((知,材也). 지각이란 것은 아는 것의 근거가 되지만 그 자체가 아는 것은 반드시 아니며 밝혀진 것과 같은 것(若明)이다. 생각이란 추구하는 것이다(慮,求也). 생각이란 것은 그의 지각으로서 추구하는 것이지만 반드시 앎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며, 엿보는 것과 같은 것(若睨)이다. 앎이란 접촉에서 생기는 것이다(知,接也). 앎이란 것은 그의 지각으로서 사물을 대하여 그 모양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며, 본 것과 같은 것(若見)이다. 지혜란 밝은 것이다(智,明也). 지혜란 그의 지각으로써 사물을 분별하여 그가 아는 것을 뚜렷이 하는 것이며, 밝은 것과 같은 것(若明)이다. 앎은 들어서 얻어지는 게 있고 추리에 의하여 얻어지는 게 있고 친히 경험함으로써 얻어지는 게 있다. 안다는 데 ..

[고전산문] 참으로 아는 것과 참으로 얻는 것

지난달에 김자후(金子厚)의 하인이 돌아오는 편에 편지를 받고 북평(北坪)에 잘 도착하신 것과 학문이 점점 나아감을 알게 되어, 답답하던 회포가 시원스레 풀렸습니다. 돌아가는 인편을 만나지 못하여 회답을 제때에 드리지 못하였더니, 자후가 돌아오는 편에 또 편지와 시(詩)를 보내 주시고, 겸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이 사람에게 문의하시는 말씀까지 보냈으니, 감사하고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나는 벽촌에서 지내다 보니 벗이 적어 함께 학문할 사람이 없습니다. 병중에 책을 보다가 때로 생각에 맞는 곳이 있으나, 본받아 몸소 실천하는 데 이르면 더러 서로 모순되는 곳도 많습니다. 나이는 많고 힘은 부족하며, 또 사방에서 벗을 얻어 도움도 받지 못해 항상 그대에게 기대하고 있는데, 두 통의 편지에서 약석(藥石)은 주지 ..

[고전산문]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신 이황은 삼가 재계하고 두 손 모아 머리를 조아리며 주상 전하께 아룁니다. 신은 초야의 미거한 몸으로써 재목이 쓸모없고 나라를 제대로 섬기지도 못해 향리에 돌아와 죽기나 기다렸는데, 선조(先朝)께서 잘못 들으시고 여러 번 은혜로운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전하에 이르러 이 잘못된 일을 되풀이하심이 갈수록 융숭해지더니 금년 봄에 관계(官階)를 뛰어넘어 제수하신 데 이르러서는 더더욱 듣기에 놀라웠으므로 신은 벼락 같으신 위엄을 범하여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사퇴하였습니다. 비록 이미 은혜로 너그러이 보살펴 주시어 낭패는 면하였으나 벼슬의 품계는 고쳐 주지 아니하시어 여전히 분수에 넘칩니다. 게다가 신이 늙고 병들어 벼슬살이를 감당할 정력도 없는데 외람되게 높..

[고전산문] 이(利), 사(私)의 분별

지난번에 《백록동규해(白鹿洞規解)》를 논한 별지(別紙)를 받았으나 병이 많아서 미적거리다가 오래도록 회답하지 못하여 부끄럽습니다. “이(利)라는 것은 의(義)의 화(和)이다(利者 義之和).”라고 한 것에 의심을 품게 되어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인용하여 그 다르고 같은 곳을 지적하여 세밀하게 분석하였으니, 생각이 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견해로는 오히려 온당하지 못한 것이 있으므로 바로 다시 가부(可否)를 여쭙니다. 이 이(利)라는 글자를 혼합하여 말해서 의화(義和) 속에 있다고 설명한 것은 옳지만, 저 사(私)라는 글자를 말하여 좋지 못한 곳으로 흐르는 것이라고 설명한 것은 잘못입니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형(形)과 기(氣)는 자기의 몸에 속한 것이니 바로 이것은 사유(私有)의 것..

[고전산문] 사회적 교제에 대하여

선생은 사람을 대함이 매우 너그러워, 큰 허물이 없으면 끊어 버리지 않고 모두 용납하여 가르쳐서 그가 스스로 고쳐 새롭게 되기를 바랐다. 선생은 사람을 대할 때 얼굴에 감정을 나타내지 않았다. 영천 군수 이명(李銘)은 본래 사납고 거만한 사람이었다. 일찍이 선생을 찾아뵐 때 방자하고 무례하여 재채기하고 가래침 뱉기를 태연스럽게 하며, 병풍의 서화를 손가락질해 가며 하나하나 평론하였으나, 선생은 그저 따라서 대답할 뿐이었다. 곁에서 모시고 앉은 사람들은 모두 불쾌한 빛을 띠었지만, 선생은 얼굴에 조금도 그런 눈치를 나타내지 않았다. 녹사(錄事) 양성의(梁成義)란 사람이 본 고을의 현감이 되었는데, 선비들이 모두 그 사람됨을 천하게 여겼지만, 선생은 그를 백성의 주인이라 해서 예의를 다하였으며 오래갈수록 더..

[고전산문] 문장의 도(道)

수재(秀才)가 나에 대해서 실제 이상으로 과대평가하는 소문을 어디에서 들었는지, 나에게 와서 문자를 묻는 것으로 일을 삼곤 하였는데, 그렇게 혼자서 자기 나름대로 학업을 닦은 지 1년쯤 지난 지금에 와서, 다시 나에게 앞으로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권면하는 한마디 말을 해 달라고 부탁해 왔다. 이것이 어쩌면 수재가 장차 과거(科擧) 공부를 하는 데에 도움이 될 말을 해 달라고 청하는 것일까? 과거와 관련된 글이라고 한다면 내가 물론 선배가 된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단지 나이가 어렸을 적에 반짝하는 재주를 한번 보여서 갑자기 급제한 것일 뿐으로서, 대체로 과거 공부라는 것을 본격적으로 해 본 일이 일찍이 없었을뿐더러, 그렇게 공부하는 것 자체를 구차하게 생각하고 있는 터이다. 왜냐하면 자..

[고전산문] 눈과 귀로 받아들이고 마음으로 길러 나간다

나는 젊었을 적에는 세상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면서 어떤 물건이든지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그 아름다움을 보고 즐길 수 있는 가치가 있는 사물들에 대해서도 그다지 좋아하는 습관을 가지지 못했다. 이런 까닭에 일찍이 왕자유(王子猷, 자유는 왕휘지(王徽之)의 자(字))가 대나무를 좋아한 나머지 “하루라도 이 친구가 없으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何可一日無此君)”라고 말했다는 고사(故事)를 접했을 때나, 소자첨(蘇子瞻, 자첨은 소식(蘇軾)의 자(字))이 이를 인하여 “대나무가 없으면 사람이 저속하게 되고 만다.(無竹令人俗)”고 읊은 시구를 접했을 때, 이를 비웃었다. 나는 말하기를,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청량(淸凉)하게 되지 못할까 하는 점만을 걱정해야지, 외물(外物)을 의지해서 저속하게 되..

[고전산문] 용졸재기(用拙齋記)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같지 않은 이유는 그들 속에 내재(內在)한 기(氣)와 이(理)가 서로 꼭 합치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기(氣)라는 것은 원래 사람이 태어날 때 넉넉하게 받을 수도 있고 부족하게 받을 수도 있는 반면에, 이(理)라는 것은 처음에는 중(中)의 상태가 못 되었던 것이라도 중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할 수 있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가령 교(巧)와 졸(拙)을 쓰는 것으로 말하면, 선천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사람의 후천적인 행위 여하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교졸(巧拙)이라고 흔히 병칭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강유(剛柔)나 강약(强弱)과 같은 상대적인 개념을 지닌 명칭은 아니다. 교(巧)라는 것은 보기 좋게 합리화하여 꾸미면서 장난을 치려고 하는 데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필경에는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