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고전산문] 산골짜기에 흐르는 시냇물처럼

중 연사(然師)는 신인종(神印宗)의 시(詩)를 잘하는 스님이다. 그의 기상은 화목하고 마음은 담담하여, 공리(功利)와 명예의 마음을 버리고 선적(禪寂)*에 잠심하니, 당대 사대부들 중에 소중히 여기는 이가 많았다. 이제 ‘고간(古澗, 오래된 산골짝기의 물, 계곡의 물)’이라는 현판을 달고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나는 생각하기를, 사람의 천성이 선(善)한 것은 물의 본성이 맑은 것과 같은 것이다. 성품이 본래 선한 것이지만 악(惡)이 생기는 것은 욕심이 유혹하기 때문이며, 물의 본성은 본래 맑은 것이지만 흐리게 보이는 것은 오물이 더럽히기 때문이다. 그 악을 버리고 그 선을 보존시키면 인성(人性)은 그 처음대로 회복될 것이며, 그 흐린 것을 없애고 맑음을 나타내면 물의 본성은 그 정상을 되찾을 것이다. ..

[고전산문] 경설(驚說)

야밤에 우뢰소리를 듣고서 벌떡 일어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한평생 지은 죄악을 다 헤아리지 못하겠다. 그러다 또 생각이 떠올랐다. 충성하지 않고 효도하지 않고 우애하지 않고 공손하지 않고 간음이나 일삼고 남을 해치거나 하여, 하는 짓거리마다 하늘의 신(神)에게 죄를 얻을 인간들이 그 수(數)를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응당 와르르 쩌렁쩌렁 둥근 쇳덩어리 불덩어리가 쏟아져, 그따위 인간들을 그 자리에서 불태워 죽이는 사건이 발생해야 하건만 그런 일이 일어낫다는 소문은 끝내 듣지 못했다. 곰곰이 따져보니, 죄많은 인간들이 지상에 두루 차 있어 가려 뽑아낼 도리가 없는지라, 인간의 운명을 관장하는 신(神)이라 해도 처치할 방도가 없을 것이다. 그저 저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둔 채 지은 죄가 가득 차기를 기다렸다 ..

[고전산문] 묵은 견해를 씻어버려야 새로운 뜻이 온다

배우는 사람이 책을 볼 때 그저 앞으로 나아가려고만 하지, 물러서서 보려 하지 않는 데서 병통이 생긴다. 앞으로 나아가려 하거나 보아 얻으려 하면 할수록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게 되니, 한 걸음 물러서서 살펴보는 것만 못하다. 대개 병통은 집착하여 내려놓지 않는 데서 생긴다. 이는 마치 송사를 처리할 때, 마음이 먼저 을의 견해를 주장함이 있으면 문득 갑이 옳지 않은 점만 찾고, 먼저 갑의 의사를 주장함이 있으면 을의 잘못을 보려고만 드는 것과 꼭 같다. 잠시 갑과 을의 주장을 내려놓고 천천히 살펴야만 바야흐로 능히 그 옳고 그름을 따질 수가 있다. 장횡거(張橫渠)는 “묵은 견해를 씻어버려야 새로운 뜻이 온다”고 했다. 이 말이 참으로 옳다. 만약 묵은 견해를 씻어 버리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새로운 뜻을 얻..

[고전산문] 독서하는 방법(讀書法)

독서의 방법은 마땅히 차례에 따라 일정함이 있어야 한다. 한결같이 해서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구두와 문장의 의미 사이에 침잠해서, 붙들어 보존하고 실천하는 실지를 체험한 뒤라야 마음이 고요해지고 이치가 분명해져서 점차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널리 구하고 넓게 취해서 날마다 다섯 수레의 책을 외운다 해도 또한 배움에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정자(程子)가 말했다. “잘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가까운 데서부터 말(言)을 구한다. 가까운 것을 쉽게 보는 자는 말(言)을 아는 자가 아니다.” 이 말이 특별히 맛이 있다. 누가 물었다. “책을 읽어도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핵심을 어떻게 바로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근래에 배우는 자 가운데 어떤 부류는 책은 버려두고, 한..

[고전산문] 곡학아세(曲學阿世) : 유림열전-원고생편

청하왕(淸河王) 유승(劉承)의 태부(太傅) 원고생(轅固生)은 제나라 사람이다. 『시』에(시경을) 연구했기 때문에 경제 때 박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경제 면전에서 황생(黃生)과 쟁론을 벌인 적이 있었다. 이 때에 황생이 이렇게 말했다.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은 천명을 받아서 천자가 된 것이 아니라 군주를 시해한 것입니다.” 이에 원고생은 이렇게 반박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대저 하나라의 걸왕(桀王)과 은나라의 주왕(紂王)은 포학하고 혼미하여 천하의 민심이 모두 상나라의 탕왕과 주나라의 무왕에게로 귀순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상나라의 탕왕과 주나라의 무왕은 천하 민심이 바라는 대로 걸왕과 주왕을 토벌했던 것입니다. 걸왕과 주왕의 백성들은 자기 군주의 부림을 받지 않고 탕왕과 무왕에게 귀순했기 때문에 탕..

[고전산문] 섭공호룡(葉公好龍): 실상은 진짜보다 사이비를 더 좋아하다

공자의 제자인 자장(子張)이 노(魯)나라의 애공(哀公)을 찾아갔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록 애공은 자장을 만나주지 않았다. 기다림 끝에, 자장은 애공의 하인에게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저는 왕께서 인재(人材)를 좋아하신다는 말을 듣고, 천리길을 멀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험하고 먼 길을 서리와 이슬, 티끌과 먼지를 무릅쓰고, 굳은살이 박이도록 쉬지 않고 걸어서 왕을 뵈러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일주일이 지나도록 왕을 만나 뵐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왕께서 인재를 좋아하신다고 하는 말은 사실과 다른 것 같습니다. 이는 섭자고(葉子高)가 용(龍)을 좋아하는 것과 아주 비슷합니다(君之好士也, 有似葉公子高之好龍也). 섭자고는 용을 좋아하여 허리띠에도 용을 새겨 넣고, 도장에도 용을 새겨 넣고, 집의 온갖..

[고전산문] 생사의 기로에 서면 사람의 진정이 드러나는 법

공자께서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不知言 無以知人).”라고 하셨다. 말은 능히 허위와 가식으로 남을 속일 수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을 아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오직 이치에 절충하고 성인(聖人)에게 헤아려본 뒤에(惟衷於理而衡諸聖 이치에 맞고 적절한 것인지 생각해보고 그 여부를 성인의 검증된 가르침을 기준으로 삼아서 헤아려 본 뒤에야) 그 말을 알 수 있으니, 말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을 또한 알 수 있다. 그러나 말은 아무 일 없을 때에는 혹 허위와 가식으로 할 수 있지만 사생(死生)의 즈음(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이르러서는 진정(眞情)이 드러나니, 허위와 가식을 어찌 용납할 수 있겠는가. 옛날 자장(子張)이 장차 죽으려할 때 그 아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군자의 죽음을 종(終)..

[고전산문] 감당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일

긍섭(兢燮)은 남주(南州)의 보잘것없는 선비입니다. 어려서부터 어리석고 나약해서 일마다 다른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였고, 다만 오직 부형(父兄)의 가르침으로 글이나 짓고 경전의 자구나 해석하는데 몸을 기탁하였지만, 또한 이미 누차 넘어졌다가 자주 일어나면서 나이가 서른여섯이 되었지만, 안에 아무것도 든 것이 없는 박처럼 속이 텅텅 비어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채 이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몸은 천지의 커다란 변화를 맞아 큰 나루를 건너는데 낡은 노조차 없는 듯 망연하니, 개인적으로 생각하기로는, 스스로 평소 학문을 하여 천하의 의리를 대략이나마 알게 되어, 우리 부자(夫子, 공자의 높임말)가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들음을 알게 된다.”라고 하신 뜻에 감동되었으..

[고전산문] 사람은 마땅히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하는 것으로 바름을 삼아야 한다

천하에는 옳고 그른 것이 있을 뿐이다.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함이 그 바름을 얻어야 군자의 도가 밝아지고, 군자의 도가 밝아져야 천하의 일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게 된다. 옛날에 구양영숙(歐陽永叔)이 ‘비비(非非)’로써 스스로 그 당(堂, 집)의 이름을 삼고 기록하여 말하기를, “옳은 것은 군자가 마땅히 가진 바이니, 사람은 마땅히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하는 것으로 바름을 삼아야 한다.〔是者 君子之所宜有 人當以非非爲正〕”고 했는데, 내가 읽어보고 의심하여 생각하기를 “군자의 마음은 선을 선하게 여김이 길고 악을 악하게 여기는 마음이 짧은데, 어찌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하는 것으로 바름을 삼기에 이르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윽고 《논어》와 《맹자》에서 무릇 고금 인물의 현부(賢否)와 득실(得失)을 논한 것을 ..

[고전산문] 가난한 생활을 하는 3가지 방법

가난한 생활을 하는 데는 다음 세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운명을 아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기운을 안정시키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의리를 변별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해야 오래도록 가난함에 처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목숨을 구하도록 괴롭도록 부지런하게 노력하고 제도를 가지고 검소하게 아낀다고 해도 말할 만한 것이 못 된다. 무엇을 가지고 운명을 안다고 하는가? 운명이란 하늘에서 정해지는 것이고, 사람의 지력으로 능히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천하는 진실로 지력을 가지고 부귀를 얻을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얻어 보면, 운명은 본래 있었던 것이다. 운명이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닌데도 천하에서는 진실로 지력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러나 하늘이 부여해주지 않은 것인데 사람들이 억지로..